그녀, 정

-시간을 밟고 21화

by 금희


" 잠깐 볼래요?"

한동안 끊겼던 정의 연락.
뜻밖이었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엔 오래 기다린 기쁨이 아니라, 깊은 우물 속에서 올라온 듯한 낮은 울림이 있었다.
수잔은 묻지 않았다. 그냥 만나러 가기로 했다.

멀리서 정이 걸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며 천천히,마치 발끝으로 세상의 무게를 더듬는 듯한 걸음이었다.
수척해진 볼, 움푹 팬 눈, 빛을 잃은 동공은 오랜 고립이 남긴 그림자 같았다.
수잔의 심장이 아련히 저렸다.

그들은 마주 앉았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정은 식지 않은 커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떨었다.
눈시울이 붉게 번지더니, 묵직한 눈물방울이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내 인생은… 실패야.”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속엔 오래 쌓인 부서짐이 있었다.
“자식들도, 남편도… 이 낯선 땅도.
어디에도, 마음 붙일 데가 없어.”
정의 이야기는 오래 묵힌 한숨처럼 흘렀다.


남편은 건설 기술자였다.
한국의 재산을 모두 정리해 이민을 결행했을 만큼, 그는 떠나고 싶어 했다.
낯선 언어는 서툴렀지만, 기술 앞에서는 벽이 없었다.
캐나다에서 그는 땀의 값을 정직하게 받는다며 웃었고, 이민자를 위한 주택정책으로 집을 사고, 재투자로 집을 넓혀가며 점점 자신감에 차올랐다.

그러나 정은 달랐다.
한인 마트 캐셔로 시작했지만, 복잡한 동전 계산과 익숙지 않은 업무에 실수가 잦았다. 재고 정리로 옮긴 뒤엔 고질병인 허리 통증이 재발해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대화를 끊고 집 밖으로 돌았고, 그녀는 고립 속에 갇혔다.
남편의 권유로 교회를 나갔지만, 믿음 없는 발걸음은 그 무리 속에서도 홀로였다.

그 무렵, 집 앞에 카지노 셔틀버스가 멈췄다.
그곳에서, 정은 오랜만에 웃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록 그 웃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수잔은 숨을 삼켰다.
정이 더 이상 ‘누군가’가 아니라, 거울 속의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다.

정은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었지만, 깊은 곳엔 단단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난 돌아갈 거야. 한국으로. 내 삶은… 거기에 있어.”
수잔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정과 헤어진 후, 수잔은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가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슬롯머신 불빛과 전자음 대신, 창밖의 햇살이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오랜만이었다. 화려한 소음 없이, 텅 빈 마음으로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는 시간.

눈을 떴을 때, 귓가엔 사람들의 고른 숨소리만 흘렀다.
그 순간, 수풀 속에 반쯤 가려진 작은 집 한 채가 시야를 스쳤다.
나무 사이로 낮게 내려앉은 지붕, 한쪽으로 기울어진 울타리.
마치 오래전부터 거기서 그녀를 기다려온 듯, 고요한 기척이 있었다.

첫 자동차 시승 날, 수잔은 저 집에 대해 폴에게 물었었다.
마을과 멀리 떨어져 홀로 선 집.
폴은 ‘빈집 같아’라고 했었다.

버스가 지나가자 집은 작아졌다.
수잔은 시선을 빼앗긴 듯 한참이나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껏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이제야 본 사람처럼.

‘내가 원하던 자유는… 저런 고요였던 건 아닐까.’

도박도, 소음도, 거짓말도 아닌,
그저 나를 위해 조용히 기다려주는 작은 공간.

그날 이후, 수잔은 그 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숲 속 집을 사겠다고.

그날 밤,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심만으로는 카지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리쿼스토어를 그만두었다.
멀리 돌아 걸으며 빈 시간을 피했고, 식당,마트 뒷정리,호텔 청소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지칠 때까지 몸을 혹사하면, 생각이 멈췄다.

그렇게 수잔은 자신을 ‘구원’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자신을 쓰러뜨릴 만큼 바쁘게 만들기로 했다.
하루를 통째로 채워 잭팟이 스며들 틈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런 날에도, 바람은 스쳤고 달은 조용히 웃었다.

이전 20화잡히지 않는 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