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시간을 밟고 25화

by 금희

알람은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었다.
수잔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아버렸다.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팔이 감겨 있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었다.

“오늘은 못 간다고 해. 당신은 좀 쉬어야 해.”
제임스가 낮게 중얼거리며 그녀를 당기며 끌어안았다. 목소리엔 투정이 섞여 있었다.

“이틀이나 쉬었어.” 수잔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러지 말고, 그냥 더 있어.”

그의 품 안에서 수잔의 가슴이 요동쳤다. 이렇게나 또렷하게 심장이 뛰는데, 예전에는 왜 이 떨림을 그저 불안하게만 느꼈을까?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들, 웃음 소리,그의 온기, 그 두근거림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최면에 걸린 듯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달랐다.

수잔은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오래 기억하려는 듯, 잊지 않겠다는 듯.


한 번도 여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 처음으로 여자여도 좋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자, 어느새 그가 자신의 삶에 내려진 선물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혼자만의 자유로운 삶을 고집하던 자신이 이렇게 빨리 마음을 열어도 괜찮은 걸까.그것도 이국의 남자에게.
게다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낯선 사람이었던 그에게....스스로를 다그치며 경계하려 했지만, 하루하루 쌓여가는 작은 순간들이, 막지 못한 감정들이 결국 그 벽을 허물어버렸다.

첫 키스는 출렁다리에서였다.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숲, 미끄러운 길을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을 때, 겨울의 옷을 벗지 못한 봄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휘청이던 몸을 제임스가 붙잡았다. 그 순간 화끈거리던 손길, 벗겨진 선글라스 너머로 마주한 눈빛.
수잔은 거부하지 않았다. 낯설고 두렵지만, 동시에 가슴을 파고드는 떨림이 있었다.


그날도 늦은 밤이었다.
창밖에는 봄비가 조용히 내리고, 숲속집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려 불빛 아래 아른거렸다.
피곤에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대앉은 수잔은 문득, 이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맞춤은 깊어졌다.
제임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수잔은 더 이상 거리를 두려는 마음을 붙잡지 못했다.
그 순간, 오랫동안 쌓여온 망설임이 무너져 내렸다.
그 밤,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제임스는 더 자주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수업이 없는 날, 호텔 청소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가 준비한 저녁이 식탁 위에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 앞에 남겨진 커피가 그의 존재를 알렸다.
가끔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차츰 같이 아침을 맞는 일이 늘어났다.
처음엔 잠시 머무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함께가 더 익숙해져 있었다.


어쩌면 평범한 삶이란 게 이런 게 아닐까.
함께 웃고, 내일을 함께 꿈꾸고,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득 차는 것.


여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일어나지 못하는 수잔은 문득, 출렁다리에서의 첫 키스를 떠올렸다.
“조금만 더 있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수잔은 웃음을 머금으며, 여전히 그때와 같은 두근거림 속에 눈을 감았다.


“이건 어떻게 발음해?”
수잔이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채 두꺼운 책을 펼쳐 물었다.
제임스는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책 속 어려운 단어를 더듬거리며 발음했다.

그럴 때면 그의 진지한 얼굴이 너무 웃겨, 수잔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스러운 웃음에 답하듯, 제임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잔의 뺨과 이마에 장난스러운 키스를 흩뿌렸다.

저녁이 되면 은은한 벽난로 불빛 아래 나란히 누워 지도 위를 더듬었다.
제임스는 손끝으로 길을 짚으며, 앞으로 둘이 함께 떠나게 될 장대한 여행에 대해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수잔이 잠들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하나의 삶을 함께 꿈꾸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며칠 뒤, 수잔의 일상에는 작은 손님이 찾아왔다.


“이 작고 귀여운 아가씨는 누구야?”
퇴근한 제임스가 린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육점에서 일하는 샘의 아내가 충수염으로 입원해, 수잔이 며칠 동안 세 살배기 린을 돌보게 되었다고 설명하자 그는 “우리 착한 수잔”이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린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였다.
집 안 물건을 뒤지고, 꽃밭을 헤집고, 이 방 저 방을 쏘다녔다.
수잔이 볼을 찡그리면, 린은 양손으로 그 볼을 잡아당겼다.

제임스는 아이를 위해 뒷마당에 그네를 달고, 집 안팎의 모서리와 울타리를 손봤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수잔이 말하면,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언젠간 필요할지도 몰라.”
수잔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린의 웃음 속에서 제임스를 닮은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낮 동안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도, 밤이면 린은 깨어나 “엄마”를 찾으며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수잔과 제임스가 정성을 다해도, 린은 엄마의 품을 그리워했다.
그럴 때면, 수잔도 어린 시절 자신이 부모님을 기다리던 밤이 떠올라 마음이 쓰렸다.
그러면 그녀도 린처럼 조용히 제임스의 품에 기대 안겼다. 그는 린에게도, 수잔에게도 따뜻했다.

샘의 아내가 퇴원하던 날, 린은 엄마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채자 한달음에 엄마의 품에 안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잔의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린을 아끼고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작고 가냘픈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수잔!”
린이 달려와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
작은 팔로 목을 감고, 한참이나 가만히 안겨 있었다.
수잔은 조심스럽게 작고 가냘픈 아이를 끌어안았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맺혔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
타인과 시작하는 새로운 삶은 불안하고 비틀거려 보였다.
그저 남의 일이라 여기며 홀로 떠돌던 삶을 꿈꿨지만,
지금은 달랐다.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는 삶…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불현듯 스친 생각에,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사람, ‘엄마’가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수잔은 아주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든 건… 아니지?”
수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그리운 가족. 보고픈 엄마와 아버지.

퇴근한 제임스는, 평소보다 많이 지쳐 있는 그녀를 알아차렸다.
식사를 준비하는 굽은 어깨가 오늘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그가 말없이 다가가 안자, 수잔은 고개를 떨군 채 작게 흐느꼈다. 제임스는 아무 말 없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오래도록 토닥였다.


늦은 봄.
민들레 홀씨가 바람을 타고, 내릴 곳을 아는 듯 하얗게 흩날리고 있었다.
자리를 찿은 홀씨처럼, 수잔의 마음도 막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