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9화
“누구야? 잘생겼는데?”
마트에서 마주친 그를 향해 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수잔은 리아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친근했다. 다시 들은 그의 이름. 김 지훈. 고국의 이름을 가진 남자.
며칠 전, 그레이하운드 버스 안.
비릿한 새벽 어항 냄새와 눅진한 여름 뒷골목의 악취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그는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말끔한 옷차림, 떠나지 않는 미소.
그 모든 것이 이민자의 굳은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또다시 우연히 그를 마주치자 수잔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가 건넨 점심 제안은 수잔에게 허풍 섞인 ‘남자의 치기’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번다고. 언제 봤다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리아의 손을 잡아끌듯 급히 마트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훈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고 가는 차들 사이로, 그녀는 점점 멀어져 갔다.
홀대당한 듯 서운한 감정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거실에 누운 수잔은 달력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보름. 그녀에게 주어진 병가. 근 1년 만의 휴식이었다.
사람이란 얼마나 변하기 쉬운 존재인가? 처음에는 그토록 절실했던 디시워셔 일이, 몇 달이 지나자 점점 무거워졌다. 싱크대에 담긴 그릇들, 세제 거품에 출렁이는 물만 봐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는 묶인 몸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사장은 그녀의 병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사회사업을 하는 건 아니잖아?.’ 투덜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수잔 대신 들어온 고등학생 알바는 이어폰을 낀 채 설렁설렁 움직였고, 싱크대 위 그릇은 쌓여만 갔다.
지각과 조퇴는 기본이었고, 아예 출근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그나마도 일을 하던 중 사라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외국의 배고픈 노동자가 아니고서야, 설거지 기계의 열기와 매캐한 세제 냄새 앞을 그 누가 선뜻 지키려 하겠는가.
수잔의 영어가 많이 늘었다고는 해도, 그녀에게 다른 일을 맡기기 위해선 정부에 복잡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게다가 옮겨줄 마땅한 자리도 없어 보였다.
해고할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상황에서,
수잔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를 구할 때까지만 디시워셔 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사장은 비로소 안도했다.
"무슨 생각해? 파티 준비해야지."
리아의 들뜬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리아의 생일 파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음식과 선물을 들고 찾아온 필리핀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고, 음악이 흐르고, 춤을 추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마리아도 돈 걱정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아래층 주민까지 합세한 파티는 점점 더 시끄러워졌고,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수잔은 예상보다 훨씬 커져버린 이 파티가 점점 불편해졌다.
그 순간, 바깥 창문 너머로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10월이었다. 짧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 벌써 겨울.
삶에 갇혀 계절을 잊고 살고 있었던가.
조용히 파티장을 빠져나온 수잔은 현관문을 열고 옷깃을 여몄다. 철문이 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찬 공기를 품은 눈이 도로 위를 적시며 서서히 하얗게 밤하늘을 덮고 있었다.
풍겨오는 커피 향에 이끌려, 수잔은 도로를 따라 천천히 팀홀튼을 향해 걸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노숙인에게 무료 커피를 주기 때문인지 , 갑자기 내리는 눈 때문인지 빈자리는 거의 없었다.
탄내와 커피 향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지만, 그 탄내마저도, 오늘 밤엔 어쩐지 그리웠다.
그녀는 커피에 설탕을 세 봉지 털어 넣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창가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종이컵을 쥔 손끝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커피는 쓴 탕약 같다는 생각이 들자 어린 시절 먹은 별사탕의 달큼한 맛이 저리게 그리워졌다.
창밖으론 거세진 눈이 바람을 따라 흩날리고 있었다.
까만 하늘 아래, 도시는 서서히 흑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문득, 자동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지금이라면, 멀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 지금이 그녀가 원했던 , 무엇에도 자신을 가두지 않아도 될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 순간,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지훈.
중고차를 구입할 때, 그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국땅에서 혼자 사는 여자가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겠는가.
수잔은 스스로를 납득시킬 핑계를 만들었다.
그저 스쳐 지나간 사람쯤으로 여겼던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가 우연히 그녀 앞에 나타난 건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그를 불러낸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수잔은 내일 그의 정비소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입 안에 퍼지는 따뜻한 향기처럼, 마음 한편이 살며시 설레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쓴 커피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