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말하는 시간 3분

-시간을 밟고 8화

by 금희

-37년의 생을, 단 3분에 담아야 했다. 나는 나를 말하는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가슴이 요동쳤다. 귀까지 얼얼해지면서 머리가 멍해지자, 딸깍이는 시계 소리만이 아득하게 들리고.

밤새 외운 문장은 턱끝에서 멈췄다. 수잔의 얼굴이 발갛게 변하고, 움찔하며 두 손이 떨리자, 시험장에서의 익숙한 모습에 시험관들은 무심한 손놀림으로 채점을 정리하려 했다.


이렇게 말 한마디 못하고 끝내고 싶지 않았다.

수잔은 자신의 목에서 퍼지는 울림에 집중하려 안감힘을 쓰고 있었다

“저는 디시워셔예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떨려오는 진동. 수잔은 묵직하게 침을 꼴깍 삼켰다.

“손등이 트고, 손가락이 타들어가며 매일 그릇을 씻고 냄비를 닦아요. 장갑은 구멍 나고 손가락마다 가득 물이 차면, 장갑은 필요가 없어져요. 그렇게 8시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을 때, 시간이 멈춰요. 그리고 저는 영어를 배우러 이민센터의 계단을 올라가요.
사람들은 묻죠. 왜 그렇게까지 애를 쓰냐고.” 수잔은 밀려 나오는 숨을 길게 뱉었다.


“그럴 때 저는 대답해요. 자유를 위해서라고.
그런데 사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한 번도 자유롭지 않았던 적이 없어서, 자유가 어떤 모양인지, 어떤 색인지 모르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저만의 자유를 찾아 여행 중이에요.”

독백 같은 '자기소개'를 끝내자, 수잔은 자신이 영어로 말을 했는지, 한국어로 말했는지, 문법도 단어도 어렴풋했다. 그저 가슴속에 숨겨둔 파랑새를 잠시 세상 밖으로 꺼내 놓은 것 같았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시험관들이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잠시 후, 박수소리가 나고 , 시험관들은 미소로 격려했다. 결국 시간 초과로 탈락했지만, 수잔은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아주 많이 대견했다. 철없는 미소가 입가로 자꾸만 새어 나왔다.


시험을 마치고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라타자, 출입문 앞에 앉은 동양인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수잔도 머뭇거리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와 조금 간격을 두고 뒷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오늘 시험장에서의 떨리던 숨결을 떠올렸다.

무엇인가 남겨둔 말들이 기분 좋게 꿈틀거리며 가슴이 울렸다.
모국어도 영어도 아닌 말들 사이에서 비틀거리던 나날들. 그 3분, 수잔은 자신을 통역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기 존재가 언어가 되었다. 그 자체가 수잔에게는 조용한 전율이었다.
오늘 하루쯤은, 그 승리 속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한국인은 묘하게도 한국인을 알아봤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수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럼없이 앉았다.
남자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한다고 했다.

수잔이 영어 시험을 위해 오늘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해주자, 그는 시험장에서 그녀를 보았다며 웃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는 3분을 채우고도 남을 말을 시작했다. 마치 룰은 필요 없다는 듯, 자신감이 보였다.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캐나다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묻지도 않은 가족 이야기까지.
중학생 때, 한국에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지인의 소개로 이민을 온 후, 그 지인에게 다시 사기를 당하고, 부모가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식당과 청소 일을 하며 어렵게 아들을 뒷바라지했다는, 마치 오래된 영화의 줄거리를 읊듯 담담하게 말했다. 한 번씩 그의 시선이 수잔의 손을 향했고,
결혼반지가 있는지를 살피는 듯한 시선이었다.
말투와 눈빛에 탐색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수잔은 여전히, 오늘 시험장에서의 자신 안의 감정에 , 그 작은 승리의 여운 속에서, 오늘은 그 어떤 동행도, 낯선 다정함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단지 같은 한국인이라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지나치게 맑고 솔직한 '자기소개'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는지도 몰랐다.

수잔은 입을 크게 벌리고 거짓 하품을 하고,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손으로 흝었다. 그가 자신에게서 관심을 거두길 바라며, 눈꺼풀을 천천히 감고 잠이 오는 척했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눈치를 챘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잔은 다시 혼자가 되자 안도했다.

6시간 후, 버스는 터덜거리며 종점에 도착했다. 이 장거리 버스에 익숙해진 자신이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부산거리보다 훨씬 긴 시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는 게 처음엔 여유인지, 거대한 땅에 살기 위해 필요한 포기인지 어리둥절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하자, 그가 주차장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걸었다.
“집까지 태워드릴게요.”
하지만 수잔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택시 타면 금방이에요.”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더 붙잡지는 않았다.
수잔은 택시에 올라 문을 닫고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달리는 차 창에 흘러내렸다.
전날보다 날씨가 부드러워진 듯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녀는 그 흐름에 조용히 기대어 앉았다.
수잔은 그의 이름을 떠올려보려 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이때까지도 그는, 그저 타인이었다.

-그랬다. 그날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후로 그는 자주 눈에 띄었다.
마트에서, 레스토랑에서, 전에는 마주쳐도 몰랐을 얼굴이, 이제는 이상할 만큼 자주 보였다.
한 번 흘러 지나가자, 매번 눈앞에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이름도 몰랐던 두 사람이, 처음에는 서툰 악수로, 다음날엔 서로의 이름을 시작으로 어느 날 물었다.

-사랑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