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수잔

-시간을 밟고 3화

by 금희

-때론 가족의 이름이 아닌 타인의 이름을 빌리고 싶다.
잠시 나를 가릴 수 있다면.-


“Do you know what a dishwasher does?”
(접시닦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나요?)
“Yes, yes. I know. Wash dishes.
(예, 알아요.. 접시 닦는 거예요)

S는 자신의 영어를 늘 ‘콩글리쉬’라며 스스로를 웃었다.

6개월짜리 여행자 신분으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영주권자가 되는 유일한 길은 고용주의 스폰을 받는 것이었고, 그렇게 ‘접시 닦이’라는 일은 언어도 문화도 낯선 이방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실한 숨통이었다.

빠른 수속을 위해 이번에는 육로로 이어진 국경을 넘어야 했다.

이민자의 땅, 방랑자의 나라라 불렸지만,
부자나라에서 온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들의 눈빛은 알 수 없는 곤혹과 안타까움, 혹은 호기심으로 파랗게, 비 오기 전 흐린 하늘빛으로 변했다.

“You are Korean. Why are you here?”
그렇다. S는 한국인이었다.

그 질문은 곧 부모님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왜? 왜 그 먼 나라를 가려는 거니? 거기에 뭐가 있는데?”
엄마의 질문은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그건 단념을 강요하는 목소리였다.

“안 돼. 여자 혼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라에서 산다고? 못 가.”
아버지의 완고한 목소리가 좁은 방 안을 울렸고,
S를 무겁게 눌렀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S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화장품도, 옷도, 영화관도 포기하며 3천만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늦어진 결혼을 걱정하며 부모님이 맞선 자리를 강행할 때쯤, 그녀는 짐을 꾸렸다.

부모님의 반대가 끝없이 치달으면서, 결국 그녀는 숨겨두었던 가슴속 울분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엄마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 왜? 도대체 왜 날 낳았어? 난 내 맘대로 살 자유도 없어? 대답해 봐.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좋은 옷을 입혔어? 대학을 보내줬어? 나도 내 인생을 살고 싶다고!
이젠 집도, 한국도 지긋지긋해!”
그렇게도 처절하게 울었던 기억이 유년의 그녀에게 있었던가?

며칠 후 S는 비행기를 탔다.

국경에서 서류를 받아 들고 숲의 나라를 지나고 호수의 나라를 지나자 차는 도심 외곽의 작은 중국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
S는 “접시를 닦을 수 있냐”는 질문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씻어야 할 접시들은 매일매일 싱크대 위로 위태롭게 쌓였다. 주방장이 꺼멓게 태워먹은 쭈그러진 냄비를 손가락이 휘도록 철수세미로 문질러야 했다.
뜨거운 물에 불어버린 손등조차,
‘수잔’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견딜 수 있었다.

S의 영어 이름은 수잔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고, S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왠지 울림이 좋았다.
그 순간, 가족이 지어준 이름은 조용히 멀어졌다.

마치 호박이 황금 마차로 바뀌는 신데렐라처럼,
수잔에게 먹다 남은 음식으로 범벅된 더러운 접시는 꿈을 현실로 바꿔주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이름, ‘마리아’를 만났다.
필리핀에서 온 그녀는 아이 둘을 고국에 두고 왔고, 남편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영주권을 받으면 아이들을 캐나다로 데리고 올 거라며 사진을 보여주며 미소 지었다.
영어는 수잔 보다 더 유창했지만, 가끔 따갈로( 필리핀어)와 영어를 섞어 욕을 할 때면 수잔 또한 한국어로 XX를 가르쳐 주며 둘은 키득이며 웃었다.

그런 그녀가 좋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루하루를 견디며 서로의 굳은 손과 지친 눈빛으로 소통했다.


설거지를 하다 깨어진 접시에 손을 베면,
마리아는 “Towel, towel,” 하며 호들갑을 떨며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늘 한마디를 덧붙였다.

“It’s okay, Susan. You are strong.”

그 말은 번번이 수잔의 마음속을 움직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강해야만 했을 뿐이었다.

마리아를 보면 문득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늘 부엌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시던 엄마의 모습. 마리아의 굳은 손끝이 엄마의 손과 겹쳐졌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수잔은 휴대폰을 꺼내 조용히 국제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