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밟고 2화
“캐나다는 왜 왔어요?”
“집에 가려고요.”
“10년 만에 처음 입국이네요?”
“… …”
말없는 실랑이 끝에, 여권을 무심히 돌려주며 심사관은 형식적으로 말했다.
“좋은 여행되세요.”
여권을 쥐고 떨리던 숨을 들이킨 순간,
S는 어느새 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의 자신과 마주하고 있었다.
붉은 스탬프 하나가 세월의 무게를 인정해 주는 듯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여행이 되어버린 S는 설렘도, 기쁨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오래전에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걷는 방랑자의 터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곳이 ‘집’이라면, 어제까지 자신이 먹고 자고 기대며 살아온 곳은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공항 문이 열리자마자 쓰레기 냄새가 바람을 타고, 그 뒤로 빛바랜 간판과 칠이 벗겨진 건물들은 서울 하늘의 뒷모습과 닮아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던가?
그땐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너무도 선명하다.
-마음이 달라지면 풍경도 다른 색을 입는구나.
어딘가 익숙한, 그러나 낯설기만 한 도시의 표정은 조용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오래된 기억이 고개를 들었다.
가난한 시장 한복판, 어린 S가 뛰어다니던 골목,
끈적한 복숭아를 주워서 돌멩이로 조심스럽게 으깨며 모양 좋은 씨앗들을 봉지에 담아 한약방을
향해 숨차게 달리던 시간, 갈색 씨앗은 달콤한 아이스깨끼로 때론 별사탕으로 바뀌며 작은 행복이 되었다.
해는 골목 뒤로 노랗게 사라졌고,
어린 S는 그 지는 해를 야속하게 바라보며 꿈을 꾸었다.
S의 꿈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쌀 한 가마니 값에 맞먹던, 칼라로 인쇄된 세계 동화책 전집.
S의 언니는 기꺼이 자신의 빠듯한 월급을 쪼개어 어느 골목길을 헤매고 있을 6살 동생을 위해 꿈을 선물했다.
꼬맹이 S 에겐 그것이,
현실의 가난과 좁은 골목을 벗어날 수 있는 파랑새의 깃털이었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밤이면 눈을 감고 미소 지으며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세계를 날았다.
그렇게 그녀는, 현실이 아닌 가능성을 믿고 자랐다.
그녀가 자신의 꿈을 엄마의 턱 밑에서 조잘거릴 때면 S의 엄마는 '구름 위에 달 같은 방랑 김 삿갓' 같다며 때로는 웃어넘겼고 , 어느 날엔 호통을 쳤다.
'하지만 꿈은... 지금, 어느 하늘에 걸쳐져 있을까?'
언젠가 떠나왔던 곳,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그곳.
그 사이를 메운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S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빠르게 지나치는 차들 옆에서, 한 여인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HOMELESS — ANYTHING CAN HELP’
그렇다. S에게도 간절한 손길이 필요했던 때가 있었다.
그 절실함이 빠진 지금,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집 .
이제는 '삶'이 아니라 '기억'만이 남은 그곳, 캐나다와의 작별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며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넌 무엇을 찾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