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밟고 4화
하늘은 너무나 맑고, 별빛은 하늘을 덮으며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토록 서러운 밤에, 이토록 냉정하게 빛나다니. 세상은 왜 이렇게 모진 동시에,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걸까.
자연의 나라.
사람들은 이 땅을 신의 축복 속에서 태어난 곳이라 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자연.
숲은 깊었고, 호수는 거울 같았다.
눈은 순수의 결정체처럼 하얗게 내렸고, 여름은 짧지만 찬란했다.
이따금, 수잔은 그 풍경 속에 섞여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비록 어눌한 말투로 버벅거리고, 아무도 그녀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저 걷고, 웃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 땅은 그녀를 받아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하루 또한 사람의 삶임을 , 수잔은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은 축복인 동시에 오만한 인간에 대한 경고라는 것을.
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삼일...그저 잔잔한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가, 밤사이 지하방 문 틈 사이로 밀려들어왔다.
어느새 바닥은 축축해졌고, 새벽엔 발목까지 물이 차올랐다. 점 점 더 거칠어지는 빗속에서 사람들은
마당으로 짐을 꺼내고, 젖은 이불을 펴고, 또 물을 퍼내며 서로를 챙겨 주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늦은 저녁,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자 복도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 누군가의 울음이 뒤섞였다.
그 모든 사이클은 아침이 올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출근을 포기했고, 하루 종일 자연과 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으로 밀려드는 자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틀이 지나자, 비는 멈췄지만 마당엔 누군가의 옷가지와 TV, 가재도구가 나뒹굴었다.
젖은 매트리스 위에서 아이가 자고 있었고,
옆집 여자는 지나가는 차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밤을 밖에서 견딜 수 있었고, 낮엔 서로 돕고 마른 빵을 나눠 먹으며 , 욕을 섞어 다투기도 했다. 어딘가에서 구린 마리화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비에 젖은 운동화처럼 눅눅하고, 오래된 기름때처럼 끈적거렸다.
그러던 어느 오후. 주민들이 물건을 다시 집안으로 옮기던 중, 정부에서 안전 점검을 나왔다. 사람들은 지원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15일 안으로 집을 비우라는 안내문이었다.
누전의 위험, 오염 가능성, 오래되어 붕괴 직전의 구조적 불안. 종이에 적힌 단어들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누군가는 친척 집으로 옮겨갔고, 누군가는 이사도 못 한 채 소리치며 버텼다.
그녀는, 그 사이에 앉아, 조용히 침묵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라. 돌아갈 곳도, 머물 곳도 애매한 지금.
수잔은 처음으로 ‘귀로(歸路)’를 떠올렸다.
아려오는 손가락의 통증보다 더 가슴 안에서 타오른 불안은 아주 오래전 대학을 포기하며 밤길을 헤매던 그날과 닮아 있었다.
정말 돌아가야 할까.
물은 다 빠져나갔지만, 수잔의 마음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그녀는, 물아래서 숨 쉬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문득, 고국의 부엌을 떠올렸다.
된장찌개 냄새가 퍼지던 저녁, 아버지, 엄마...
수잔은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걸 애써 삼켰다.
차마 울 수는 없었다. 울기 시작하면 이 외로운 밤을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아서.
수잔은 눈을 감았다. 바람 사이로 별빛이 스며들자 그 빛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아침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