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도 얼른 내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내 자리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이다. 오늘 무슨 수업이 있는지, 나는 몇 학년인지, 누가 내 친구인지도 하나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책가방은 제대로 챙겨 왔는지 불안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서 들어오신다.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나를 탓해본다. 어서 정신 차리라고! 그런데 선생님의 한 팔에 안긴 종이 뭉치가 예사롭지 않더니 학생들에게 나눠진다.
세상에... 오늘은 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나는 시험을 보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건지 몰랐던 건지도 알 수 없고, 시험공부를 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시험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시험지가 이내 뿌옇게 보이는 통에 문제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다른 아이들은 일제히 머리를 박고 웅크린 몸 안에서 사각거리는 샤프소리로 에코를 만들며 문제풀이가 나름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시계소리마저 째깍이며 운을 더하니 뭐라도 해야겠는 불안에 안경렌즈라도 닦는 듯이 눈을 연신 비비고 크게 뜨기도 해 보지만 저주처럼 시험지만 불투명해 당황한 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진땀을 흘린다.
아마도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왜 보이지 않지?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당황스럽게 학생이 되어 시험을 맞닥뜨린 것처럼 갑자기 눈을 떴다. 온몸에 긴장감이 남아있고, 가슴이 무거운 것은 그대로인 채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휴~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한숨을 쉬고 의식적으로 어깨를 내려본다. 온몸에 긴장을 풀어주는 걸로 나는 나를 위로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제나처럼 마음에 계획이 생기고 목표를 세울 때면 이런 꿈을 꾼다. 시험이든, 어딘가를 가는 중이든, 난처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뭔가를 모르거나 못하거나 잘 못되고 있는 그런 꿈.
꿈은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렇게 흔들기 시작하고 무겁게 누르는 것인가?
맘속에 품었을 때 괴롭다면 그것은 욕심이며,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 하시던 유명한 스님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머리가 지끈하고 가슴이 뻐근하다. 맞다. 아마도 맞는 말이라서 그렇게 얹히는 것일 것이리라. 내가 가슴속에 품는 것만으로도 잰 호흡을 하게 되는 것은 먼 곳까지 빠르고 순탄하게 가고 싶은 나의 비현실적인 욕심덩어리 꿈이기 때문에 깨어서도 잠들어서도 나를 흔들고 버거움에 지쳐버리게 하는 것이리라. 분명 내가 꾸는 꿈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위인이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은커녕 작은 가게주인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심통이 난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뿐히 하는 일상적인 일들조차 나에게는 과욕이라는 것인지, 나는 그런 것도 못하는 바보라는 것인지.... 누구한텐가 서운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게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실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좀 놓아줬으면, 나를 제대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습지만 결코 그냥 드는 마음이 아니다. 분명 항의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왜 이러냐고, 나한테 왜 이렇게 하냐고... 은연중에 나를 창조한 존재가 있다고 혹은 내 운명의 그물을 짜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가 보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치워버린다. 어쩌겠는가. 지금 내가 허깨비를 붙잡고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맘이 불편하다고 울고불고 실컷 티를 내도 어느새 달려와 일으켜 세우고 어디가 문제인지 살펴서 해결해 줄 엄마가 쫓아올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이다.
나는 어쨌든 답을 찾아야 하고, 내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생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꿈도, 내 욕심도, 내 혼란도 끝은 없을 것이라는 예측에 이르게 된다.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면서도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절망의 끝도 영원한 희망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정신을 계속 차리고 있는 일이 쉽지 않기에 자꾸 잊게 된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기억을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잘 못 믿고 있던 것들이 많은 만큼.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있었지만 그런지도 모르고 있던 많은 것들, 그 속에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정신을 차리려고 할 뿐. 너무나 간단한 듯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정신이 지금 온전히 작동하고 있는지, 마치 꿈꾸는 사슴처럼 허둥거리고 있는지 어떻게 시시각각 알아챌 수 있겠는가. 그 변화를 어떻게 눈치챌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지난한 훈련뿐이라는 것은 나에게 또 희망과 절망을 가져다준다.
모호하고 긴 여정만큼 나에게 힘든 미션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시작과 끝이 있고, 이쪽과 저 쪽의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이미 시작되어서 다른 무언가로 연결되고, 경계를 넘나들며 그 명암의 균형을 오락가락한다. 그 융통성 있고 여유로우며 부드러운 형태는 나로 하여금 손에 잡히지 않는 비눗방울 온전히 잡으려 쫓는 아이처럼 지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이게 무엇인가?’ 분명하게 알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나의 바람일 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으며 그런 방식에는 아무 문제도 결점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시험을 제대로 ‘보기’ 위해, 명확히 알고 대처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니 그렇게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느라 충혈되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는 보지 않아도 되는 것과 보아야 하는 것 모두 볼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여러 번 나는 갑자기 학생이 되어서는 예상치 못한,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던 시험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고, 여기에 있는 나를 구하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려고 눈을 부릅뜨는 시도를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꿈에서 깨기 전에 긴장을 풀고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려보내는 나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결국엔 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먼저 알아주고 밖을 ‘보기’보다 내가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