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드로잉 하기_ 02
바로 전의 글에서는 "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형태를 잡는 단계이다. 형태.. 즉 모양을 그리는 것이다. 아마도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형태를 잘 잡겠다는 마음을 버린 지 오래다.
"형태를 잘 잡는다."라는 것은 대상을 똑같이, 아니면 비슷하게 그린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어떻게 해도 대상과 비슷하게라도 그리질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언젠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형태를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그 후 그림 그리기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대상과 똑 같이 그리려고 하지 마라!"
그렇다. 그리려는 대상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우리는 행복한 그림 그리기를 할 수 있다.
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어떤 방법을 써도 대상과 똑같이 그릴 수 없었다. 즉, 형태 잡기에 영~ 재능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펜 드로잉으로, 밑그림 없이 한 번에 그리면서 형태를 잘 잡기란 불가능하다. 이점을 인정하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마음 가짐을 새로이 먹었다면, 이제 펜 드로잉을 해보자.
펜 드로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로 원근법이다.
풍경 드로잉을 할 때 그림을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 방법이 원근법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가 이다. 그런데 대상을 관찰해도 원근감이 그렇게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인위적으로 원근감을 살려 그리면 완성도가 좋을 확률이 높다.
대상을 보고 그릴 때 보이는 대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기에 그동안 잘 관찰해둔 기억과 경험, 그리고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 인체 드로잉의 예를 들어 보겠다.
대략적인 인체의 과학적 지식이 있다면 인체 드로잉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 이유는 보이는 대로만 그리다가는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체를 그리다 보면, 100% 대상과 다르게 그려진다. 특히 펜 드로잉은 그렇다. 그럴 때 인체의 비율이나 형태의 특징을 안다면 지금 그려지고 있는 나의 그림에 맞춰서 드로잉을 변형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림의 완성도가 올라간다. 대상과의 일치성은 떨어져도 독립적인 내 그림은 어느 정도 완성도가 생긴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똑같이 형태 잡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원본과 달라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림을 그릴 대상의 선정도 중요하다. 얼굴 드로잉을 예로 들어 보겠다. 처음 드로잉을 하는 사람일수록 잘생긴 사람을 그려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개성 있는 얼굴을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특징을 잡아낼 수 있는 얼굴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형태를 똑같이 그릴 수 없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대상과 비슷하게 보이는 방법이 없을까? 비슷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 있는데.. 참 애매모호한 말이다. 비슷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상의 특징을 살리면 된다.
하지만 우리 같은 실력으로는 대상의 특징을 잡아내기도, 표현하기도 참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특징이 도드라진 대상을 선정해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위의 그림은 같은 사람을 그린 것이다. 같은 사람을 그려도 그릴 때마다 달라진다. 그리고 그린 대상이 누구인지는 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은 "원더우먼"이라는 것을 알 확률이 높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처음 시작하는 펜 드로잉의 대상이 확실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좋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물을 대상으로 드로잉을 할 때 그나마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동작 위주로 드로잉을 하는 것이다. 얼굴 클로즈업 드로잉은 정말 그리기 어려웠다. 얼굴에 특징이 있는 유명인을 많이 그렸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래서 꼼수를 부린 것이 그 대상의 유명한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영화의 한 장면을 드로잉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위의 예시 드로잉은 영화 더티 댄싱의 한 장면이다. 두 주인공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지만 영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그림인지 잘 알 수 있고, "비슷한 느낌"도 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러 드로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사람의 얼굴보다 사람의 동작을 그리기가 쉽다는 것이었다.
펜 드로잉 형태 잡기를 정리하자면.. 대상의 형태를 똑같이 잡기는 불가능하다. 포기하라. 내 그림의 형태적 완성도를 높이려면 잘 안 보이는 요소를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 대상과 비슷하게 그리고 싶다면 특징이 두드러진 대상을 선정하고 특징을 잘 살려라. 인물화는 얼굴을 똑같이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인물의 동작이 살아있는 장면을 그려라.
대상과 똑같이 형태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