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장 그리고 이야기 하나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멋진 풍경이나 인상 깊은 장면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나의 오브젝트만 달랑있는 모습은 별로 그릴생각이 없었습니다. 학생시절 미술시간에 정물을 그린 기억이 있나요? 저는 정말 재미없었습니다. 단순한 물건하나를 아무리 정성껏 그려도 예쁘게 나오지 않더군요.
풍경그림은 기본적으로 디테일보다는 조화와 구성이 중요합니다. 그 후 디테일을 추가하게 되지만 조화와 구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디테일을 추가해도 그림이 이상하게 됩니다. 물론 정물그림도 조화와 구성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디테일을 표현하지 않으면 매우 허전하게 되죠. 디테일을 표현한다는 말이 그냥 자세하게만 그린다는 것은 아닐 겁니다. 풍경그림과는 또 다른 표현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래 그림들은 실물을 찍은 사진을 보고 그렸습니다. 아마 눈앞의 실제 사물을 보고 그렸다면 완전 다른 그림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위의 귤이나 계란 사진을 고른 이유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귤은 껍질이 벗겨져있고, 계란은 깨져있습니다. 그냥 동그란 귤이나 계란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동그라미를 오렌지색으로 칠하거나 하얗게 놔두면 귤이나 계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탁구공과 구별할 수 없음을 곧 알게 되죠. 정물을 그린다는 것은 표현의 한계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위의 토마토를 그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 특징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토마토의 특징은 꼭지입니다. 꼭지의 가늘고 삐죽삐죽한 이파리들이 토마토를 토마토로 보이게 하죠. 물론 다른 특징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가?입니다. 저는 토마토 꼭지를 선택했습니다.
위의 사과 역시 그냥 동그란 사과보다 크게 한입 베어 물은 사과를 고른 이유를 아시겠죠? 동그란 사과와 토마토를 어떻게 구별되게 그릴 수 있겠습니까? 위의 사과 그림에서 신경 쓴 포인트는 저 가운데 조그맣게 보이는 씨입니다. 사과씨가 박혀있는 모습이 사과의 특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일 등 각종 먹을거리들을 그리는 것이 참 재미있게 느껴지네요. 어릴 적 학교에서의 수업받던 정물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재미를 줍니다.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 그것을 그림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의 재미를 맛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