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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한장이야기 Aug 07. 2020

현재를 산다는 것은 현재의 표준을 따른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라


나의 가치 관중 하나가 "현재를 살아라."이다. 이것은 "카르페디엠"이나 "욜로"와는 좀 다르다.


어느 날 푸드코트에서 내 나이 또래의 무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의 이야기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옛날 "당산대형"이란 영화의 "이소령"에서부터 "취권".. 그 밖의 옛날 자신들의 전성기 때 이야기들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나 미래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현재를 살고 있는가?" 나 자신에게 물었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를 잊고 앞만 보고 가면 되는 걸까?


내가 그리는 드로잉의 대부분은 옛날을 기반하고 있다. 추억의 영화, 음악, 골목길 등등을 그린다. 그런 나는 과거에 사는 것일까?


그래서 실질적으로 현재를 산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결론은 "현재의 표준을 따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그림을 그린다. 그림의 주제나 소재는 옛날 영화에 대한 추억이다. 그런데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어서 동물을 사냥해서 그 털로 붓을 만들고 천연염료를 제조해서 물감을 만들어서 그림을 그린다면 나는 과거에 사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표준이다.


먼저 말했던 과거 이야기만 했던 그들이 만약에.. 오늘 말도 나왔으니 이소령 영화나 보러 가자며 전국에 하나 남은 필름 영사기로 상영하는 극장에 간다면 그들은 과거에 사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적인, 산업적인 표준을 따른다면 어떨까?


내가 옛날 소재와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데 펜과 종이를 사용하고, 결과물은 스마트폰으로 SNS에 올린다면.. 더 나아가 디지털 디바이스로 바로 드로잉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소령 영화를 보고 싶은 중년의 아저씨들이 집에 모여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지금 이 순간, 또는 바로 곧 실현될 표준을 따르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현재의 교육을 하고 있는가? 과거의 교육을 하고 있는가?


내가 어릴 때는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배웠다. 어느 학생이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 묻는다면 첫 반응은 맞는 것이고 그다음 대답은 이럴 것이다. "남들 다 학교 나왔는데 너만 안 나올 거야?!" 그 당시 표준은 남들 다 하는 거 그대로 따라 하기였다. 그 당시 어른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학교 교육이 사회에서는 쓸모없다는 것을.. 그때의 표준은 학연, 지연, 등으로 인맥에 의한 삶이 표준이었다. 학교에 가는 숨은 진짜 이유는 학연이라는 인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지금 부모들은 학교에 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자녀들에게 말해줄까? 남들 다가는 학교는 꼭 가야 한다고? 입 밖에 내놓지 못한 진짜 이유는 학연이라고.. 그렇다면 과거에 사는 것이다.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곧 올 미래의 표준은 학교도 학연도 아니다. 그리고 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이제 표준이 아니다. 제조업의 시대는 끝났고 4차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긴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다. 옛날 교육의 표준은 제조업 시절에 맞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지금의 표준에 맞춰서 교육을 가르쳐야 한다.


결국 시대의 표준은 변한다. 옛날이 좋았어~ 라며 현재를 부정해도 현재의 표준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남의 이야기라며 그렇게 IT서비스를 거부했던 노인층이 "유튜브"와 "배달앱"의 주요 고객이 된 것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누구보다 먼저 현재의 표준을 따르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 이념이나 표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양성일 것이다.


누군가는 동성애자들이 세상을 망칠 거라며 그들의 평화적인 축제에서 난동을 피우고 심하면 그들을 테러하기도 한다. 비혼으로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며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다며 맹 비난을 하기도 한다. 현재의 사회적 표준에 맞는 것일까?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표준은 다르다. 나의 취향이 동성애자를 인정할 수 없고, 비혼을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적 이념과 표준을 거슬러서는 현재를 살 수 없다. 현재의 표준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취향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취향을 추구하면 된다. 단,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말이다.


(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최진석"은 사회적 이념과 기준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적극 동감하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사회적 이념과 기준에 갇혀있는 과거의 나 자신이다. 완전한 정답은 현재의 사회적 이념과 기준도 아닌, 순수한 나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의 사회적 표준과 등 돌리고 살 수는 없다. 결국 나의 욕망을 따르되 현재의 표준과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


현재를 산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을 현재의 표준 속에서 이루려는 노력이다.


어느 작가가 있는데.. 그는 원고지에 연필로 손으로 직접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낸다고 한다. 출판사는 그의 작품을 디지털화하는데 다른 작가들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글의 주제를 현재의 것으로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글의 이야기는 선사시대를 말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현재의 사회적 표준, 산업의 표준, 세상의 표준을 따라야 한다.


물론 산속에서, 외딴섬에서, 방구석에서.. 과거의 표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자연인이네.. 아날로그 삶의 힐링이네.. 하며, 그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과거만 산다는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우리는 과거를 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현재만 살 수 있고, 현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라"하면 "카르페디엠"을 떠올리며 뭔가 대단하고, 특별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현재, 지금 이 순간만 살 수 있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지극히 지루한 삶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현재의 표준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 지루함은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다. 소통이라는 것도 현재의 표준을 따를 때 수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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