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유럽에서 머무르며 쓴 여행기이다. 86년이면 어느덧 30년,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라는 건데,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책을 읽는 내내 정말 유쾌했다. 이런게 바로 하루키의 힘인가?
'노르웨이 숲' 과 내가 읽다 만 '댄스댄스댄스'가 유럽을 여행하며 쓴 책이라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노르웨이 숲'은 최근에 다시 읽었는데 정말 좋았고, '댄스댄스댄스'는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의 여러 섬들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까지. 단순히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가 되어 3년이라는 시간을 부인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던 그가 부럽다. 작가라는 특수한 직업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호사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말처럼 '이방인'일 수 밖에 없는 유럽이라는 낯선 땅에서 매일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나는 유럽의 특정 나라에 대한 배경지식도 없고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조차도 잘 모르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를 보고 난 후로 언젠가는 피렌체가 있는 이탈리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물론 하루키는 '피렌체'라는 도시를 좋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된다면 한 도시에서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키가 유럽에서 생활했던 방식들, 가령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고 매일매일 산책을하고,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적인 그런 모습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30년전의 유럽과 지금의 유럽은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꿈꾸는 '여행'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의 이 책이 그 어떤 여행기보다도 로맨틱하다고 느껴졌다. 딱딱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처음의 불안감도 잠시, 4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몇 번이나 혼자 키득거리며 읽었는지 모르겠다. 30년전의 유머가 아직까지도 통하는 걸 보니 그도 참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루키처럼 내게도, 여행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순간이 온다면, 나도 떠날 수 있을까. 이방인이 아님에도 늘 이방인같다 느껴지는 지금의 생활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생활방식과 문화에 눈을 뜨고 거기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다시 돌아오고 싶어지는 그런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될까? 하루키가 몸서리치게 악담을 한 로마라는 도시에서의 대책없는 생활도, 언젠가는 꼭 한번 해보고 싶은 토스카나 지방에서의 와인투어도, 한없이 여유로울 수 있을 것 같은 그리스의 외딴 섬에서의 일상도 내게는 정말 배가 아플만큼 매력적이기만 했다.
내게 먼 북소리를 들려줄 그 곳은 어디일까. 나는 그 소리를 따라 결연하게 떠날 수 있을까.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어쩐지 여행기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이를 먹는 것 자체는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떤 한 시기에 달성되어야만 할 것이 달성되지 못한채 그 시기가 지나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그것도, 내가 장기적으로 일본을 떠나려 한 이유중 하나이다. 일본에 있으면, 일상에 얽매여 있는 사이에, 긴장감도 없이 질질 나이를 먹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말하자면 정말 알알하게 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생의 시간을 자신의 손으로 쥐고 싶었고, 일본에 있으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 P 14
그렇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도무지 긴 여행을 떠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 P 16
내가 결혼 생활에서 배운 인생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고 싶어하는 때에 참지 않고 화를 낼 수 있도록 해주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 일이 생긴다. : P 67
매일 소설을 쓴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때로는 자신의 뼈를 깎고, 근육을 짓씹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쓰지 않으면 더욱 괴로웠다. 글을 쓰기는 간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문장도 쓰여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그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기 위한 집중력이다. 그리고 그 집중력을 가능한 한 오래 지속시키는 힘이다. 그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면, 어느 순간 그 괴로움이 돌연 극복된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일. : P 160
나흘간 우리는 이 항구 마을에 체재했다. 이 마을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흘간, 우리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있다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고, 호텔 베란다에서 바다를 구경하고, 어시장을 힐끗거리고, 시장 근처에 있는 프사리 타베루나(어패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또 산책을 하였다. 비가 내리면 근처 마켓에서 포도주와 파파 드롭프스 크래커를 잔뜩 사들여 놓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 P 252
"그러면 우선 테스팅을 해보세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우리에게 지하실을 한 바퀴 둘러보게 한 후, 뒤뜰로 안내해 주었다. 뒤뜰에서는 해 저무는 토스카나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멋진 풍경이다. 언덕이 보이고 여기저기에 호수가 점점이 산재해 있다. 구름이 길게 뻗쳐 있고, 저 먼 언덕 위로는 중세의 성벽이 보인다. 그리고는 한없이 펼쳐지는 밭과 포도원. ········· 테이스팅이라고 하여 찔끔찔끔 입에 물고 맛을 보는 그런 테이스팅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종류의 포도주가 한 병씩 나온다. 그리고는 커다란 포도주 잔에 찰랑찰랑하게 포도주를 따라 준다. 맛도 있거니와 모처럼 내준 포도주를 남기기도 아까워 결국 세 병을 전부 비우고 말았다. : P 369
내 생각에 이렇듯 '한 줄기 인생'을 걷는 장인 기질의 사람을 우연찮게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미덕인 듯하다. 이 나라에는 적당주의자도 많지만, 일부 사람들은 정말 성실하게 빈틈없이 일을 한다. 그들은 혼자서 묵묵히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물건에서는 생활의 산미 같은 것이 배어 있다. 그런 부분이, 이러니저러니 불평을 늘어 놓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이탈리아의 매력, 저력이다. : P 371
나는 그저 나이를 먹었을 뿐,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도 생각한다. 다시 한번 출발점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은가, 더욱 혹독한 지경에 빠질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고. 그렇다,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 편이다. : P 431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맨 처음 존재했던 자신의 사고에서 무언가를 '제거'하고, 또 거기에 무언가를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시켜, '새롭게 보존 할' 수가 있다. 그런 작업을 몇 번이고 거듭하는 사이에, 자신이란 인간의 사고나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일시적인 것이며 과도기적인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 P 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