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나는 왜 당연하게 김포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낯선 이국 땅임에도 제주도 갈 때만큼이나 짧은 1시간 5분의 비행이었기 때문일까, 난생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떠났던 이번 휴가의 시작은 나의 덜렁댐을 여실히 증명하며 시작되었다.
호기롭게 집을 나선 뒤 인천공항행 리무진 버스를 한 대 보내고 김포공항행 버스에 올라타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일본에서 사용할 유심칩을 인천공항에서 픽업하는 것으로 신청을 해놨었는데, 순간 나는 '왜 바보처럼 인천공항으로 신청한 거지? 돈 날렸네'라며 속으로 쯧쯧,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면세점도 좀 둘러볼 시간이 있을 것 같은데 김포공항 면세점은 별거 없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김포공항으로 가는 게 맞던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e-ticket을 꺼내보니 웬걸. 내 비행 일정은 'Incheon International Airport-Hukuoka International Airport'였다.
갑작스럽게 가게 된 휴가였고, 떠나기 3일 전 급하게 예매한 항공권이라고는 하지만 나 스스로 멍청함에 놀라고 '늦으면 어떡하지' 가슴이 콩닥콩닥 벌렁벌렁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고속도로에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김포공항에 내려서 급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25분쯤 달렸는데 택시비는 4만 2천 원쯤. 그래도 일찍 깨달은 게 어디냐며 나를 다독이고 탑승 수속을 하러 갔다. 내 키 반만 한 배낭을 메고 줄만 한 시간쯤 서있었는데도 내 순서가 오질 않아 초조해하고 있는데 내가 탈 비행기의 탑승수속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같이 줄 서있던 사람들은 내가 탈 비행기보다 늦은 시간에 탑승하는 사람들이었고, 결국에 나는 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해서 간신히 탑승 수속을 마쳤다. 출발 하기도 전에 마음이 초조하고 시간도 촉박해서 결국 예약해놓은 유심칩은 찾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속은 텅 빈 채 탑승장으로 들어와 버렸다.
'혼자 가는 여행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너무 급하게 생각 없이 떠나는 여행이라 그런가? 나 무사히 갔다 올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들을 하며 그래도 제시간에 비행기를 탔다. 혼자 별짓을 다했는데, 겨우 1시간 5분 뒤 후쿠오카에 도착하니 설레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한국에서 찾지 못한 일본 유심칩을 사느라 거의 4만 원 돈을 또 지불했고, 유심칩을 교체하고 휴대폰 설정을 바꾸는데만 한 시간을 혼자서 낑낑댔다. 유심칩 하나 바꾸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니. 무엇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데도 이렇게 떠나온 걸 보니 나는 대책 없이 멍청하고 용감한 사람인가 보다.
도쿄나 오사카 쪽은 안 가봐서 그곳들의 분위기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갔던 일본의 도시들은 대개는 서울보다 차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내 눈에 비친 후쿠오카 사람들도 단정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후쿠오카 시내는 '텐진'이나 '하카타' 주변이 가장 번화가인데, 나는 너무 늦게 예약을 하기도 했고 저녁 늦게 도착하는 일정이라 그나마 저렴한 곳으로 숙소를 예약했는데 나름대로 위치가 좋았다. 나카스 강 주변이라 산책하기도 좋았고, 후쿠오카에서 가장 크다는 '돈키호테'에서 걸어서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나무랄 데 없는 일본식 비즈니스호텔이었다.
급하게 오느라 110V 변환 어댑터도 챙겨 오질 않아서 '돈키호테'에 잠시 들렀다. 그곳은 정말 신세계였다. 식료품부터 전자제품까지 진짜 없는 거 없이 다 있는 것 같았다. 쇼핑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동전파스며, 휴족시간이며 흔히 '일본에서 꼭 사 와야 하는 리스트'에 속하는 제품들은 이미 진열대에서 텅텅 비어버린 상태였고, 악착같이 제품들을 쓸어 담고 있는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 사람들이었다. 어딜 봐도 마주치는 익숙한 그 얼굴들에 나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졌다.
나는 여행지에서 한국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하기만 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보기 싫어도 봐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요즘 들어 그것들이 괴롭고 싫어 대책 없이 떠나온 것이니까 되도록이면 낯설고 그래서 오히려 무신경해질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단 며칠만이라도 일상적인 규칙들과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댑터를 사서 나오니 어느덧 시간은 9시가 넘었고, 어쩌다 보니 하루 종일 굶었던 터라 여행 와서 첫 끼는 무조건 맛있는 것으로 먹고 싶었지만, 구글맵을 켜고 한국어 안내 음성을 들어도 길을 찾지를 못하는 나 같은 길치는 그냥 눈에 보이는 아무 곳이나 들어가 밥을 먹는 게 상책이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한 가지 확실히 느낀 것은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방향치, 길치라는 것.
혼자 여행하긴 굉장히 난감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 먹은 나의 첫 끼.
후쿠오카는 일본에서 우동을 처음으로 전파한 곳이라는 설도 있던데, 후쿠오카에서 만들어지는 '하카타 우동'은 면이 부드럽고 투명하게 우려낸 깔끔한 국물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 데나 들어가 먹은 이 우동이 그렇게도 맛있었던 걸까? 게다가 역시 맥주는 일본. 일본은 맥주! 우리나라보다 반쯤은 저렴한 가격으로 생맥주를 즐길 수 있으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억울함과 텅 빈 속이 순식간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나카스 강의 밤 풍경.
강변을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촌이 유명한 곳이어서 관광객, 현지인 할 것 없이 북적북적하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나도 아무 곳이나 자리 잡고 앉아 맥주 한 잔 했을 텐데. 말도 안 통해서 주문을 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삼삼오오 모여서 흥겹게 먹고 마시는 사람들 보니 어쩐지 움츠러들어 구경만 하고 돌아왔다.
숙소 근처에 있던 푸드만 파는 마트.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도시락이며 샐러드, 그날 그날 먹기에 적당한 소량씩 포장된 반찬들까지 선택의 폭이 다양해서 좋다. 가장 인상 깊었던 '명란젓'과 미니 와인들. 명란젓은 두 피쓰씩 포장되어 있는 데다 가격도 저렴해서 사 와서 맥주랑 먹었다.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명란젓이 좋다. 한국에서는 저렇게 소량씩 팔지도 않을뿐더러 엄마 집에나 가야 맛볼 수 있어서 어쩐지 귀한 느낌이다. 큰 병은 혼자서 한 번에 다 못 마시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서도 홀짝홀짝 잘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니와인도 탐나는 아이템이다.
묵었던 호텔 앞에 있던 작은 공원.
다음날 아침 도시락 사러가는 길에 보니 8시밖에 안되었는데도 30도는 될 정도로 더운 날이었는데 벤치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미 우는 소리가 시끄러웠고 이른 아침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햇빛이 뜨거웠는데도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어딜 가나 힘든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구나, 내가 이 곳에서 만난 고요하기도 하고 흥겹기도 한 풍경들은 그저 도시의 조각일 뿐 그 이면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들이 훨씬 많겠구나' 싶었다.
토요일의 후쿠오카는 서울의 어느 동네들 만큼이나 소란스러웠고 밤공기는 후끈후끈했다.
나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알지 못했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잃을까 조금은 두려워하며 멀리 가진 못한 채 주변만 맴돌았다. 서울에서는 일부러 낯선 동네를 찾아가 하염없이 걸어 다녔던 나였으니, 일본의 낯선 땅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찌 보면 내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지도를 봐도 방향감각이 없으니 목적지를 두는 게 의미가 없었고, 목적지가 없으니 오히려 편안했다.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욕심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다니거나 유명하다는 곳을 꼭 가봐야겠다거나 하는, 짧은 여행에서 나를 조급하게 만들고 여행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자고 다짐했었다. 출발이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괜찮아진 밤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