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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Feb 15. 2021

거북이처럼 살기

 강아지, 고양이, 오리너구리, 판다, 쿼카, 웜뱃, 수달, 비버와 같은 동물들의 복슬복슬하고 둥글둥글한 생김새는 나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사람들의 스트레스 통치약이다. 이런 동물들 중 유난히 나 혼자 더욱 사랑하는 동물이 있다. 바로 거북이. 

 거북이가 비교적 귀여운 외모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은 이유는 거북이 만이 지니고 있는 여유로움 때문이다. 큰 눈을 느리게 껌뻑 거리며, 턱을 천천히 움직이며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헤엄을 친다기보다, 물속에서 떠다니는 듯한 거북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덩달아 모든 것에 초연 해지는 느낌이 든다. 거북이의 삶은 내가 속박되어 있는 세상 속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연애 시절 거북이 씨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라고 말했을 때, 거북이 씨는 상당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부터, 곰돌이, 강아지 등 내가 지금까지 모아둔 폭신폭신한 동물 인형들을 가리키며 ‘여기에 거북이는 없는데?’라며 의문을 품었다. 내가 거북이는 그 외모보다 거북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날 매료시킨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북이 씨와 하와이를 여행하던 중 하루는 하나우마 베이에서 스노클링을 했다. 그곳에서 거북이 씨는 처음으로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거북을 실제로 목격했다. 우리 둘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거북이를 관찰했다. 거북이는 한 번씩 짧은 팔다리를 움직이며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컴컴한 새벽에 하나우마 베이에 도착하여, 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바닷속에 들어갔다. 때문에 주변에 관광객도 얼마 없었고, 물은 부유물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늘의 태양이 맑은 물을 관통했다. 수영복 밖으로 노출된 팔과 다리,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물의 느낌으로 우리가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을 뿐, 시야가 너무 맑아 거북이와 우리 사이에는 공기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속에서 자유로운 거북이는 딱딱한 산호로 보이는 것들을 뜯어먹기도 하고, 물의 흐름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우리에게 귀여운 꼬리를 보여주기도 했다가, 단단한 입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거북이는 더욱 넓은 바다로 헤엄쳐 나갔다. 

 거북이 씨는 자연 속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북을 실제로 처음 보고 매우 감격했다. 내가 거북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거북이로 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피부로 이해했다고 했다. 숙소로 돌아온 후에 거북이 씨는 폴리네시안 원주민 타투샵을 찾았다. 그리고 왼쪽 어깻죽지에 폴리네시안 스타일로 거북이를 한 마리 새겼다. 


 사실, 거북이 씨는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거북이를 많이 닮았다.

 내가 뿌리를 두고 있는 원가족을 제외하고 거북이 씨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 중 하나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 학원 친구로 만났다. 심지어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 잠시 사귀기도 했다. 그 이후에 계속 친구 내지는 지인의 사이로 지내다가, 성인이 되고 몇 년이 지난 추석날 각자의 본가를 찾았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혼을 빼놓는 거북이 씨의 들이댐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연인이 되어 있었다. 3년의 연애 후 결혼식을 올렸고, 벌써 결혼한지도 햇수로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 시간 동안 지켜보면서 거북이 씨와 함께라면 나도 거북이의 꼬리 정도는 닮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북이 씨는 모든 것이 다 자연스럽다. 물과 하나가 되어 떠다니는 거북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원래부터 이렇게 진행될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매끄럽고 부드럽다. 거북이 씨와 함께 있으면 이전에는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일도 어느새 의식하지 못한 채 흘러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것 하나 억지스러운 게 없어 늘 놀라웠다.

 더욱 신기한 점은 물에 둥둥 떠 있는 거북이가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마법처럼 어느샌가 도착하듯이, 거북이 씨도 아등바등하지 않는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스며들듯 이뤄간다는 점이었다. 거북이 씨의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는 매 년, 매 달, 매 시간 단위로 계획을 짜야만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던 나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다. 


 어느 날은 거북이 씨가 나에게 “하기 싫어서 못해”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마법사들이 해리포터가 처음 ‘볼드모트’를 입 밖으로 꺼내 소리 내어 외쳤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금기를 입 밖으로 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기 싫어서 못한다’고 소리 내서 말하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살아’, ‘다들 하기 싫어도 참고하는 거야’, ‘미래를 위해서 하기 싫은 것도 해야 돼.’등의 익숙한 말들이 비난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거북이 씨와 함께 생활을 공유하며 지켜보니, 거북이 씨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책임감을 지키는 선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점차 나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확신과 그렇게 살 수 있는 구체적인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귀국 전날 받은 타투 시술 때문에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10시간가량을 제대로 기대지도 못한 채 불편해 보였으나, 거북이 씨는 자신이 거북이를 업고 있음에 만족스러워했다. 

 등에 거북이를 새긴 덕분에 실제로 그 거북이를 매일 보는 건 거북이 씨가 아니라 동거인인 나다. 거북이 씨의 피부에 스며든 거북이를 보면서 반짝반짝한 햇살을 받고 바닷속에 떠 있는 거북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거북이처럼, 거북이 씨처럼 나만의 시간과 흐름으로 살아가리라 매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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