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은 없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행복하게 사는 우리 엄마에게 고마웠다. '엄마'를 떠올려 보면 하이톤의 큰 목소리와 웃는 얼굴, 그 시원한 미소에 걸맞은 웃음소리 등이 떠오른다. 사람이 꼬인 게 없이 앞뒤가 똑같고 원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요구하고, 서운한 점도 바로바로 섭섭하다고 표출한다.
나는 엄마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외모적인 부분이 그러하다. 큰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속설을 깨고 엄마와 판박이다. 둘 다 마르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만 커서 어릴 때 엄마가 날 안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 시절에 흔히 볼 수 없는 혼혈인 줄 알고 착각했다고 한다. 물론 엄마가 외국인이라고 짐작하고. 요즘 들어 외모뿐만 아니라 엄마의 성격을 닮고 싶다고 많이 생각한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를 보았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더불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감독이 천재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영화에 몰입하게 되었다.
영화는 처음에는 정치 스릴러 내지는, 유괴된 아이를 구출하는 스릴러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 '스릴러'가 가지고 있는 클리셰에서 벗어나 이야기가 예상치 못하게 달려간다. 관객을 상대로 '밀당'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연홍(손예진)과 종찬(김주혁)은 부부로, 민진이라는 딸이 하나 있다. 선거를 앞두고 유세활동을 펼치는 정신없는 첫날 딸이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연홍은 선거를 더 중시하는 종찬에게 실망하고 스스로 딸을 찾고자 한다. 종찬의 정치적 라이벌 노재순, 민진의 단짝 친구 미옥, 민진이가 왕따 당했다고 말하는 담임교사 소라 등이 의심스럽게 등장한다.
연홍이 복수를 마치고 민진이 묻혀있던 곳으로 돌아와 미옥과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단순히 슬픔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벼운, 목구멍에서 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감정이 밀려와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눈물이 터져 멈추지가 않았다.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고군분투해온 연홍이 복수 끝에서도 결국에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점도, 미옥이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민진을 위해 그 여린 몸으로 복수를 하고 친구를 손수 땅에 묻었다는 점도, 그리고 민진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엄마는 '멍청하니 자신이 지켜줘야 한다'라고 믿었다는 점도 모두 영화 말미에 휘몰아치며 나를 강타했다.
특히 어린 소녀 민진이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담임선생님에게 몰래카메라를 선물하고, 자신의 아빠와 담임선생님의 불륜 장면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를 빌미로 협박하면서 느꼈을 혐오와 수치심, 분노와 절망감을 떠올리며 가슴이 많이 아팠다.
이는 딸과 엄마만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연대감, 유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한국사회에서, 특히 딸의 입장에서, '엄마'는 안쓰럽고 불쌍한 존재이기 쉽다. 이는 대한민국 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현재 딸들이 당연히 누리는 것을 엄마 시대에는 쉽게 가질 수 없었고, 현재 나의 눈에는 명확한 부당함이 엄마 시대에는 인내하고 감내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엄마처럼 살아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동반한다.
오죽하면 "Korean Daughter 병"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생겨났을까. 한국 딸들은 혼자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호텔에서 에프터눈 티를 즐기며 이러한 소소한 사치를 한 번도 누리지 못했을 엄마를 떠올리며 마음 한 구석에 정체모를 죄책감을 맛본다.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어른이 된 아들에게도 조금은 다른 "Korean Son"병이 발병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엄마가 안쓰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감정이 효심으로 이어지기보다, 문제의 소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결혼하고 나서 보니 '엄마'가 된 자신의 와이프와 자신의 엄마가 비교되는 경우이다. 현대 사회에서 엄마로 사는 와이프에 비해 자신의 엄마는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하였고 포기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갑자기 엄마가 불쌍해지면서 현재 이룬 가족보다 엄마가 더 마음에 쓰이게 된다. 자신의 아내는 이미 누리는 게 많으면서도 여전히 바라는 게 많다는 생각을 무의식에 가지게 되면서, 가정 내에 균열이 생기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엄마가 행복하게 사는 건 참 중요한 일인 것 같다. 내가 우리 엄마에게 고마운 점도 그 점이다. 나 역시도 물론 엄마가 더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하와이 해변에 앉아서 엄마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감정에 안타까움 내지는 슬픔이 동반되지는 않는다. 그냥 '좋은 것이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의 감정이다.
엄마는 전반적으로 즐겁게 삶을 살았고, 나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늘 발산했고, 현재도 스스로 자신은 행복하다고 자부한다. 엄마가 행복한 삶을 사는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계신 아빠에게도 감사하다.
나도 내 자식에게 '내 인생이 행복한 엄마'가 되어 부채감 따위를 남겨주고 싶지 않다. 자식이 나이가 들면 함께 성인이 되어 세상을 알아가는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