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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Jan 06. 2023

제3의 언어

 책을 사랑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꿈은 내가 사랑하는 작가에 의해 짓밟혀있었다. 나의 10대는 문학의 부흥기와도 같았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한국에 소개됐고,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 출간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황금가지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완역본을 차례차례 출판하기 시작했다. 푸아로와 미스마플에 빠져 추리소설을 탐닉하던 중 ‘지적 미스터리’라는 수식어에 이끌려 <장미의 이름>을 만났다. <장미의 이름>은 특별하다. 내 인생 세 번째로 완독한 1000페이지가량의 ‘벽돌책’이었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반년 가까이 애거서 크리스티를 끊었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이후 읽는 추리소설들이 갑자기 시시해져 버린 탓이었다. 작가 움베르트 에코가 궁금했다. 미학, 기호학, 언어학, 철학, 건축학, 인류학 등 약 40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무려 8개 국어에 유창하다니! 천재구나. 이런 사람이 작가가 되는 것이구나, 싶어 나는 열정적인 “독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20대에 단편소설을 쓰며 다시 작가의 열망이 반짝 타오르기도 했다. 그 불꽃은 조셉 콘라드가 꺼뜨렸다. 폴란드에서 나고 자란 그는 20대에 들어서며 영어를 배웠고, 성인이 되어 익힌 외국어로 <암흑의 핵심>과 <로드 짐>을 썼다. 하늘에서 작가의 재능과 숙명을 점지해 준 사람만이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또다시 독자의 삶을 선택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으나 ‘문학’은 버린 채 ‘영어’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요즘 다시 글을 써보니, 영어를 익히는 것과 글쓰기는 매우 닮아있다. 언어학자 Krashen은 언어 습득에 있어 인풋의 중요성을 체계화하여 “Input Hypothesis”라는 이론을 성립했다. 쉽게 말하면 충분하고 질 좋은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 즉 발화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풋은 내 수준에 +1을 한, ‘이해 가능하지만 도전할 만한’ 정도의 레벨이어야 한다는 게 포인트인데,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야 쓸 거리가 생긴다. 그렇다고 읽기에 편하고 쉬운 것들만 접해서는 안 된다. 여성이 받아온 불합리한 차별, 자주성을 획득하려던 투쟁, 실패와 좌절 그리고 성공에 관심이 있어 <작은 아씨들>를 읽었다면 <제인 에어>, 그 후에 <자기만의 방>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거쳐, 마지막에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까지 도전해야 한다. 물론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원서를 주야장천 읽는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자연스럽게 입이 열리기는 힘들다. 말하는 연습을 통해 점차 영어라는 언어의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내면에 구축해야 한다. 쓰는 행위가 빠진 다독이 저절로 수려한 글 솜씨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다른 언어학자 Swain은 그래서, 아웃풋에 초점을 맞췄다. 인풋을 받은 만큼 발화를 해야 진정으로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을 ‘Comprehensible Output Hypothesis’로 정리했다. ‘이해 가능한’ 아웃풋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영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써보면 나의 읽기나 듣기 실력에 비해 말하기와 쓰기는 훨씬 뒤처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어색하고 부족한 수준을 메꾸기 위해 틀린 발화를 계속해서 수정해 나가야 비로소 언어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 글쓰기도 직접 써야만 의미가 있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나 세상을 감동시킬 만한 주장도 글로 옮기기 전까지는 실체를 가지지 못한다. 머릿속을 활자로 옮기면서 내 생각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곤 한다. 나의 내면에서는 명확한 색채와 형태를 띠고 있는 개념과 가치를 나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괴로움 끝에 처음 만들어낸 문장과 문단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고 오류투성이다.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정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한다. 


 영어로 밥벌이를 하면서 이놈의 영어에 애증을 느낀다. 영어는 언제까지나 나에게 학습된 언어일 뿐, 습득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계속 인풋을 찾아 헤매고 연습을 해도 네이티브가 될 순 없다. 글쓰기는 나에게 제3의 언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3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타고난 움베르트 에코나 조셉 콘라드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창성을 기르기 힘들다는 ‘증’에도 불구하고 학습된 언어는 공부를 통해 계속 발전시킬 수 있다는 ‘애’의 부분이 고무적이다. 나의 영어 실력은 내 노력과 함께 오늘 보다 내일, 올해보다 내년에 더 고급스러워질 테다. 제3의 언어도 그러지 않을까? 네이티브의 유창성을 획득하진 못하더라도 지치지 않고 쓴다면 제3의 언어도 점차 내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나의 언어’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게 ‘30대의 나’가 다시 글쓰기에 도전하게 이끄는 신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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