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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Kim Dec 11. 2019

1. 둘째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요즘처럼 육아에 대한 정보가 범람하지 않았던 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나는 그 시대 특유의 투박하고 차별이 만연한 육아 방식으로 자라났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지만 누가 봐도 아들을 얻기 위한 딸 딸 아들의 자녀 구성 속에서 내 역할은 딸이면서 동시에 둘째였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 유년기 사진 속 언니가 파마의 긴 머리였고, 나는 남자아이 길이의 커트였으니 내 역할에 대한 정의는 나름 합리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다.


   부모님의 회상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나는 유독 심술을 부릴 때가 많았다고 한다.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껴서 늘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이어서 그랬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내가 느끼기에 부모님은 언니에게는 첫째라서, 남동생에게는 남자니까 라는 머리말을 붙여가며 더 많이 베푼 것 같고, 내게는 동생이니까, 누나니까 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양보를 권했다. 둘째라는 피해의식은 이미 어려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둘째의 피해의식은 호적의 진실을 인지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내 호적상 부모님은 자녀가 없는 큰아버지 부부였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에 인지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언니는 첫째라서, 남동생은 남자니까 라는 머리말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나는 짐작했다.


   조선 시대 서자의 서럽고 비장한 마음에 버금가던 사춘기 둘째의 피해의식은 나름대로는 건전한 방법으로 극복되는 듯했다. 공부 잘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중학생 때를 기점으로 공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방과 후 그리고 방학의 모든 시간은 복습과 암기, 예습과 영어 단어로 채워졌다. 학교 성적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부모님에게 1순위가 되었다는 게 그 무엇보다도 기뻤다. 반 1등, 전교 1등 그리고 명문대 순위권 입학과 졸업. 부모님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셨지만 곧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둘째 딸이 되었다.


   둘째 딸이라는 뿌리 깊은 피해의식은 키가 크고 몸이 크면서도 함께 자라났다. 아마도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런 나의 모습은 늘 눈에 띄었을 것이다. 내 못난 마음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고, 외로운 나는 더 피해의식 속을 침잠해갔던 것 같다. 빛나고 생동감 넘쳤던 내 10대와 20대 초반이 그렇게 지나갔다는 게 지금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서른을 전후로 부모님에게 내 상처를 진지하게 꺼내보았다. 처음에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지만, 눈물과 고성이 오갔던 갈등을 여러 번 거치고 나니 이제는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다. 여전히 부모님은 나에 대한 차별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엄마는 종종 에둘러 사과를 전하고는 한다. 그때 육아에 대해서 지금처럼 배웠다면 더 잘 키울 수 있었을 거라고. 아빠는 내가 본인을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부모님은 지금 내 피해의식의 근원인 호적을 되찾아 올 준비를 하고 계신다.


   나도 둘째 딸이라는 피해의식을 버려보려고 조금씩 노력 중이다. 어쩌면 부정적인 내 생각이 그동안 나를 더 상처 받기 쉬운 사람으로 만든 건 아닌지 객관적으로 나를 보려고 노력 중이다. 이제는 그냥 나 자신에게 한 마디 다정하게 해주고 싶다. 애 많이 썼다. 넌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가슴이 벅차고 따뜻해지는 인정과 위로를 건네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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