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기억하고자 하는 순간의 오고 갔던 대화와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이 지었던 표정과 행동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세세히 기억하는 덕에 과거의 일을 가지고 친구들끼리 내기라도 하게 되면 나는 늘 이겼다.
좋은 기억력은 특정한 순간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 내 의지로 생각하는 순간은 주로 좋았던 기억들이다. 따뜻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당시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고는 한다. 지금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 강아지와 봄날에 마당에서 햇볕을 쬐면서 앉아있던 평온했던 기억처럼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순간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할 때는 다시 눈을 떴을 때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문제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순간도 계속 생각난다는 사실이다. 내 의지가 아닌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힘든 기억은 언제나 괴롭다. 잠에 들려고 할 때, 밥을 먹을 때, 양치질을 할 때. 일상생활 속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훅 들어오는 괴로운 기억들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힘든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한테 왜 그랬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기억 속 대상을 죽을 만큼 미워하게 되는데 해결되는 건 없이 내 속만 더 상하고 만다.
힘든 기억의 반복 재생은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빈도며 강도가 더 심해졌다. 소정의 월급은 내 성과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상사나 동료 또는 후배와 함께 지낸 시간에 대한 위로금인가 싶을 정도로 회사 생활은 늘 경험과 예상을 뛰어넘는 이상한 사람들과의 연속된 사투였다. 비도덕적인 임원, 엄한 데 화풀이해대는 상사, 내로남불이 따로 없는 졸렬한 선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후배, 일을 떠넘기는 동료, 욕설로 공격하는 민원인들까지.
회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미워하다 보니 악몽처럼 연속으로 떠오르는 괴로운 기억 때문에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는 월요일은 잦아졌고 반복되는 소화 장애로 정상적인 식사조차 어려워졌다.
힘든 기억도 내 삶의 일부겠지만, 영화 속에서처럼 내게도 무언가를 잊을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마음에 상처를 남긴 순간을 하나만이라도 잊어버리고 싶다. 괴로운 기억에 침잠해가는 건 스스로 병을 키우는 일이니까. 잊혀진 기억의 자리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따뜻한 기억을 한 번 더 떠올리며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사람답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