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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Kim May 31. 2020

<엄마의 시절 음식>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밤 퇴근길에는 문득 엄마가 차려주던 구수한 아욱국과 갓 지은 밥이 떠오른다. 회사일 때문에 잦은 배탈을 달고 사는 내게 엄마 음식은 언제나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위안이었다.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 식품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엄마의 온기가 담긴 집밥은 독립한 뒤로는 늘 그립다.    


엄마는 늘 외갓집에서 보내주신 식재료로 우리집 밥상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었다. 엄마도 외갓집에서 먹었던 집밥이 그리웠는지 할머니의 음식과 엄마의 음식은 비슷했다. 밥상에는 언제나 뜨거운 찌개나 국이 올라왔고 외갓집에서 담가 온 김치는 시원했으며 매실이나 마늘종 장아찌가 입맛을 돋워주었다. 직접 깐 잣과 땅콩이 들어간 멸치볶음, 메추리알이 잔뜩 들어간 장조림, 매콤하고 쫄깃한 어묵볶음, 아삭한 식감의 감자볶음, 살짝 데친 쌉싸름한 두릅까지. 엄마가 내어주던 반찬은 갓 지은 밥과 참 잘 어울렸다. 저녁에는 종종 마당에서 휴대용 버너에 생선이나 삼겹살을 구워주셨는데, 그런 날이면 우리집 삼남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젓가락질을 해댔다. 하루 세끼 외에 엄마표 간식도 가끔씩 떠오른다. 설탕에 버무린 튀긴 누룽지, 큼지막한 만두 피안에 속재료가 가득 찬 김치 만두, 견과류 씹는 재미가 있던 달큼한 약밥, 손에 쥐고 먹기 좋았던 외갓집 옥수수까지. 마음이 허기진 날에는 엄마가 만들어주던 음식들이 모두 다 그립다.     


엄마가 해주시던 그 많은 먹거리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매년 정해진 시기에 먹었던 시절 음식이었다. 정월대보름과 삼복 그리고 동지가 되면 엄마는 할머니가 해주셨다던 계절 특식을 만들어주었다. 대대로 먹었다던 계절 특식을 먹으며 한 해를 보내는 건 우리 집만의 문화였다.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 우리집 저녁상은 늘 오곡밥과 각종 나물로 푸짐했다. 직접 구운 김 위에 찰기가 도는 오곡밥을 올리고 고사리, 고구마순, 말린 호박, 시래기, 도라지 같은 나물들을 조금씩 더해 쌈을 싸 먹는 건 독특한 별미였다.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의 음식은 건강한 포만감이 들었고, 엄마는 이렇게 먹어야 농가에서는 겨울에 부족한 영양을 채울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정월 대보름 당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귀밝이술과 부럼이 식탁에 놓여있었다. 학교 가기 위해 눈을 뜨고 나오면 아빠가 건넨 포도주를 한입씩 마시고 잣이나 밤, 땅콩을 부럼 삼아 이로 깨물어 먹었다. 친구들은 안 한다는 귀밝이술 마시기와 부럼 깨기는 한 해를 건강히 보내기 위한 우리집 식구들만의 비밀스러운 의식 같아서 언제나 설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에 우리집 가족들은 무조건 삼계탕을 먹었다. 엄마는 더운 날씨에 땀을 흘려가면서도 한 번도 잊지 않고 초복, 중복, 말복에 찹쌀과 한약재를 닭 속에 아낌없이 넣어 푹 고아낸 삼계탕을 끓여주었다. 엄마 아빠가 뜨거운 김이 나는 닭고기를 발라주면 나와 내 형제들은 아기새처럼 바로바로 고기를 받아먹었다. 이열치열이라며 잘 먹어야 더위 먹지 않는다던 엄마의 독려 속에서 정신없이 삼계탕을 먹다 보면 온몸에 땀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는데, 찜질이라도 한 듯 나른했던 그 기분은 어린 나이에도 참 좋았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득 채우던 매미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난 뒤에는 금세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추워질수록 낮은 짧아지고 밤은 점점 길어졌는데,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저녁에는 팥죽을 먹었다.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 때문인지 검붉은 색의 팥죽이 괜히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한 입 먹으면 느껴지는 고소한 맛과 직접 빚은 새알심을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던 팥죽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어른인 엄마는 팥죽에 소금을 넣었고, 어린 나는 소금 대신 설탕을 넣어 먹었다. 바깥공기는 차가웠지만 따뜻한 방 안에서 먹는 팥죽은 따뜻했고 꿈처럼 달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날이 늘어난 뒤에야 나는 엄마가 해주던 모든 음식들이 무언가 남달랐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같은 메뉴인데도 밖에서 사 먹는 건 분명 엄마가 해주던 음식과는 달랐다. 엄마의 집밥은 할머니가 만든 재료와 엄마의 시간과 정성이 담겨 그 자체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고 지칠 때는 위안을 줄 수 있었다. 집밥은 단순한 음식 그 이상으로 엄마가 할머니와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동시에 자녀들과 추억을 만드는 매개체였다는 걸 어른이 된 나는 알게 되었다.  

    

할머니에서 엄마에게로 그리고 엄마에게서 내게 이어진 우리집 밥상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마도 내게서 내 아이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해주었고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대로 내 아이에게 계절 특식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나물을 차려주고, 복날에는 뜨거운 삼계탕을 끓여주고, 동지에는 팥죽에 들어간 새알심을 같이 빚으면서 나는 내 아이에게 시절 음식을 먹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밥상과 시절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면서 나는 엄마와 엄마의 엄마 그리고 그 위의 어머니들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추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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