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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Mar 26. 2020

게임에 빠져드는 아들과의 빅딜

게임 때문에 좋아하던 책을 멀리하는 자녀

아들은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TV를 보다가도 재미가 없다며 꺼버리고 책을 펼칠 정도다. 학교도 가야지, 밤 8시 (지금은 9시)가 취침 시간인데, 그 전에 숙제도 끝내야지, 초등학생이 하루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TV 시간마저 책에 쏟는다고 하면 놀랄 수밖에 없다.


14년 전 아들과의 도서관 나들이...걷지도 못하고 책장을 간신히 붙들고 있어야 하는 아기가 읽을 만한 책은 없는데도 아들은 유독 이 코너를 좋아했다.



그러던 아들이 초등학교 졸업 후 중등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의 나이에 이르자 또래들이 즐겨 하는 컴퓨터 게임의 세계에 눈을 떴다. 당시 영국에서는 마인크래프트와 포트나이트가 유행했다. "이런 게임을 모르면 친구들과 대화가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가족 토론 끝에 주말에 한해 일정 시간 동안 게임을 하도록 허락해줬다.  


몇 주간 별 문제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어느 시간대에 게임에 접속해도 대기 중인 친구가 있다고 할 정도로 게임에 빠져 사는 다른 청소년에 비해 우리 아이는 주말에만, 그것도 정해진 시간만 하니까 괜찮은가 보다 했다. 


하지만 아들의 독서 태도부터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TV 보다 더 좋아하던 책에 대한 흥미가 시들해진 것이다. TV를 다시 더 많이 보기 시작했고, 게임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방송을 주로 골랐다. 책을 읽더라도 게임에 관한 내용이었고, 인터넷 검색을 해도 게임 작전과 규칙 이해가 주 관심사였다. 나의 감시망을 벗어나는 동안 휴대폰으로 게임도 즐겼다. 


2-3일이면 한 권을 다 읽어낼 만큼 아들이 즐기던 추리소설 시리즈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권이 아들의 책상에 몇 주가 지나도 계속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이다.  


다른 학부형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부도 아이에게 미치는 게임의 폐해를 두려워하면서도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게임을 못하게 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게임을 못하는 아이로 놀림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아들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춘기 자녀와 담판을 하려면 부모의 의견 제시만으로는 어렵다. 이를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정보 수집은 물론 반박으로 나올 만한 의견에 적절히 응수할 수 있도록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도 꽤 오랜 준비를 거쳐 아들에게 빅딜을 제시했다. “아들 이거 어때?” 



독서 시간 = TV + 게임 시간 



간단히 말해 독서에 투자한 시간만큼 TV와 게임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다. 가령, 책을 한 시간 읽으면 TV 30분 + 게임 30분의 시간이 생기는 식이다. TV 대신 게임만 한 시간을 할 수는 없다. 게임에 비해 조금이나마 덜 유해한 TV 시청 시간을 강제로 배정하면 게임 시간을 그만큼 제한하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반대로 TV만 보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아들이 의외로 쿨하게 동의했다. 어차피 좋아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기만 하면 되는 데다, 주말에만 허락되던 게임을 주중에도 할 수 있다니, 자기로서는 손해 볼 일 없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 모자의 역사적인 빅딜이 성사되는 순간이지만 여기까지는 대략적인 밑그림만 그린 것일 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과 머리를 맞대고 실무회의에 들어갔다. 


우선 독서 시간을 어떻게 측정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같은 분량의 페이지를 30분간 읽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10분 만에 읽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책마다 한 페이지 분량도 다르다. 학교 과제를 스마트폰에 저장하는 방법을 배운 아들의 제안으로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구글 포토의 구글 렌즈

이미지 속 문자를 편집이 가능한 문자로 전환해준다. 종이로 된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이 앱을 사용하면 100%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전자 문서에 복사해 넣을 수 있는 문자가 된다. 


이미지에 있는 문자를 복사해서 넣을 수 있는 문자로 변경한다.



영어 맞춤법 검사기 Grammarly

이름 그대로 영어 문장의 맞춤법, 문법을 검사해주는 프로그램인데, 글자 수와 난이도에 따라 읽는 시간을 계산하는 기능도 있다. 아들은 글자가 가장 많아 보이는 페이지를 골라 이 앱을 활용해 책 읽는 시간을 정했다.


이런 앱을 내게 설명하는 과정이 아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있었다.



위 프로그램들로 얻어낸 정보와 함께 독서 날짜와 책 제목, 시작 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등 다양한 데이터를 엑셀에 입력하고, 책 분량에 따라 독서 시간과 게임 시간을 산정하는 계산식 유도 등 나름 방대한 작업을 아들과 같이 해냈다. 


책 제목과 페이지, 시간이 기록된 아들의 '독서 기록장'



이 정도 문서 활용은 나 혼자도 가능하지만, 아들의 참여를 최대한 유도했다. 엄마의 일방적 지시가 아닌 빅딜을 성사시킨 동지끼리의 협의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한, 이 표에다 자신의 독서 기록을 수시로 남겨야 하는 아들의 수고도 덜 뿐만 아니라, 훗날 불평을 최소화시키려면 아들의 손으로 거치게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봤다.


생긴 건 평범해도, 

-게임에만 몰두하려는 아들의 관심사를 책으로 돌리려는 엄마와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게임을 더 많이 해보려 하는 아들 

이 둘의 눈물겨운 콜라보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빅딜이 성사된 다음 날인 일요일 오전, 아들의 모습



위 사진은 연출된 것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수시로 사진을 찍어대는 나의 행동에 익숙하다. 물론 이같이 공개되는 자리에 올리려면 당사자의 허락은 받는다. 


아침에 깨자마자 불이 켜진 공부방에 가보니 아들이 잠옷 차림으로 책을 읽고 있다. 나와의 빅딜이 성사된 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전날 독서량이 부족했다 싶은 날이면 더더욱 열심이다. 


아들: 오늘도 신나는 게임을 할 수 있겠구나

나: 오늘도 아들이 책을 많이 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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