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볼 것이다.
부하직원을 노예 부리듯 하고 늘 안하무인의 태도로 나오는 사람이다. 반면, 고위 간부들에게는 어찌나 아부를 떠는지. 이 사람 때문에라도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과연, 최 부장이 없는 곳으로 옮기면 내가 행복해질까?
현실에는 이 부장도, 정 과장도 있고, 하다 못해 신입사원 김 모 씨도 있다. 나를 괴롭히는 존재는 어느 회사에나 있다. 회사의 불투명한 미래나 박봉 때문에 고민할 수도 있다.
어디를 가든 내가 싫어하는 것만 피해 다닐 수 없다. 이직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무엇인지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고민해야 한다.
해외 이민을 단순하게 놓고 보면 이직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태어나 성장하고 가족과 친지, 친구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말이 통하는 곳. 이 세상에 고국처럼 익숙한 곳은 없다. 그럼에도 고국이 싫은 이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이나 환경, 직장, 정치, 교육 등 나를 괴롭히는 요소가 있기에.
이 지옥 같은 나라만 벗어나면 다 해결되겠지 싶어 무작정 외국행을 택했다가는 더 견디기 힘든 지옥이 기다릴 수 있다.
방송 도중 A가 토로한 말이다.
해외 이민을 꿈꾸는 사람을 위해 원하는 국가에서의 삶을 체험하게 한 후 이민 여부를 결정하는 내용의 영국 방송이다. 오래전 TV로 시청한 데다 이와 유사한 방송이 많아 제목은 확실하지 않다.
A는 영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다가 가족과 함께 스페인행을 택했다. 지긋지긋한 영국 날씨를 피할 만한 곳에서 제2의 인생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전이니 취업도 자유롭다. 고국 땅과 가까우면서도 화창한 날씨를 한없이 즐기기에는 스페인이 제격이다. 영국 이민자도 많으니 고국 사람과의 교류도 가능하다.
이 가족이 몇 주간 체험한 스페인은 어떨까?
영국에서 잠시 익혔던 스페인어 실력은 별 쓸모가 없었다. 관광이 아닌 생활에 쓰는 언어는 다르다. A의 아내가 상점에도 들르고 관공서에도 가보지만, 어디서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 스페인어가 오가나 싶더니 대화는 이내 영어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소통은 힘들다.
남편에게는 더 큰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취업 담당자는 외국인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는 병원을 소개해줬지만, 취업은 불투명했다. 스페인에도 영어를 하는 물리치료사가 필요하지만, 현지 언어는 제쳐두고 영어만으로 취업하기는 힘들다.
이 남자에게 손을 내민 일터는 농장뿐이었다. 결국, 깔끔한 유니폼 차림으로 환자를 맞이하던 영국에서의 일상과는 딴판이 돼버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토마토 상자를 나르는 고단한 이방인의 삶이 펼쳐졌다. 한국의 방송 '체험 삶의 현장'이 연상되었다.
A의 아내도 애초에 기대했던 스페인에서의 삶과 딴판이라 실망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집에 살면서 언제든 해변으로 달려가 뜨거운 태양 아래 드러눕는 일상을 꿈꿨지만, 주어진 예산으로는 바다 전망이 있는 집을 구하는 건 무리였다. 더군다나, 남편은 그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겨운 노동을 해야 하지 않는가.
결국, A의 가족은 스페인행을 포기하고 만다. 영국 날씨를 피하려 했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건 고국에서보다 더 힘겨운 삶이었기에.
기회만 되면 영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한국인 B의 말이다.
늦은 시간까지 피곤한 몸으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자녀가 안타까워서다. 그토록 힘겹게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지만 그 순간부터 취업을 걱정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캠퍼스의 낭만 대신 신입생 때부터 공무원 시험이나 고시에 매달린다.
이 때문에 입시 경쟁이 덜한 외국에서 생활하며 아이의 부담을 줄여주겠다고 했다.
B가 자녀를 데리고 영국에 와서 기대하는 바는...
아이가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대한 부담은 줄이고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힌다.
영어 실력을 쌓은 뒤 한국으로 복귀하면 입시에도 유리해진다.
혹은 영국에 남아 계속 학업을 이어가서 대학까지 진학한다.
일 것이다.
누구나 해외에 나오면 생소한 문화와 언어 때문에 힘들어한다. 어릴수록 언어 습득과 환경 적응이 빠르다 해도 모든 아이가 외국에서 쉽게 적응하는 건 아니다. 같은 한국에서라도 전학 간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지 않은가.
자녀가 중학생 이상의 나이라면?
이 시기는 영국의 학부모도 자녀의 학교 선택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한다. 영국의 학교에는 과목별 성적에 따라 우열반으로 나누어 수업한다. 졸업시험 성적이 학교마다 공개되므로 이를 학교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지만, 분명 영국에서도 성적에 대한 부담을 가진다.
내가 제일 우려하는 바는, 지역에 따라 폭력, 따돌림 문제가 심각한 학교가 있다는 점이다. 성적이 우수한 외국계 학생을 질투하고 괴롭히는 아이도 있다.
B와 같은 의도로 영국에 왔다가 몇 년 뒤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자녀의 어눌해진 한국어 실력과 느슨해진 학업 태도를 예전으로 되돌리는 문제로도 고민한다.
가족과 함께 영국에 처음 오는 C가 요청한 사항이다.
앞으로 이 여성의 행로가 우려되었다. 성격상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상처를 쉽게 받을 듯해서다.
C는 내가 운영하던 블로그를 통해 내 지인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영국과 관련 있다 싶은 이에게 모조리 연락해 정보가 될만한 건 다 보내주세요,라고 했단다. 심지어는 상충된 견해를 제시한 이까지 들먹이며 누구 의견을 선택해야 하냐고 물었다. 자칫, 내가 무심코 한 말까지 타인에게 전달될 가능성도 있었다. C를 대하는 일이 점차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학생과 직장인, 공무원, 교수, 상공인까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교민 사회는 한국의 지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외파에 대한 동경심 때문인지 자칭 내로라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주변 사람의 진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들 부푼 꿈을 안고 오랜 준비 끝에 해외로 나왔건만, 나보다 못하다 싶은 이가 더 잘 나가는 것 아닌가. 혹은, 금수저 출신이 별 노력 없이 편하게 사는구나, 로 보기 마련이다.
어떤 사회에서라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 인간관계가 한결 편해진다.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이를 지켜보는 일이 괴롭거나 혹은 나의 성공을 질투하는 이가 꺼려질 때, 거리를 두면 된다. 또한, C처럼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오려는 이가 피곤할 때도 이런 자세는 필요하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맹신하는 행위도 위험하다. 한인 사회에서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믿고 피해를 보거나 사기를 당할 수도 있어서다.
우리 가족은 양배추와 셀러리로 김치를 담고 요리의 간은 대부분 태국산 액젓으로 한다. 한국 식재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생겨난 습관이다. 아침에는 빵과 시리얼을 주로 먹는다. 30년 이상 한식을 고집하던 남편조차 '내가 이런 음식을 먹고 즐길 줄이야'라는 말을 요즘 입에 달고 산다. 아들은 쿠스쿠스와 파스타면에 된장을 비벼 먹는 등 나보다 더 실험 정신이 강하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어디를 가나 먹거리로 걱정할 일은 없다.
진정 한 끼라도 한식 없이 못 살겠다 싶은 사람은 한국에서 머무는 편이 낫다. 해외에도 한인 식당과 식료품점이 있을 테니 언제든 한식을 접하겠거니 기대하면 안 된다.
해외에 거주하는 학생이나 직장인, 자영업자, 주부, 프리랜서까지 누구든 이런 상황을 떠올려보자.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밥을 먹는다.
점심시간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식사한다.
모임이 끝나고 단체로 술집에 간다.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간다.
여행을 다니며 현지 특산물을 맛본다.
한식만 고집한다면 이 모든 활동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삶 자체가 고역이다. 조금 더 열린 자세로 받아들여보자.
커버 이미지: Photo by NastyaSensei from Pexels커버 이미지: Photo by NastyaSensei from Pexel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