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뒤 동네를 산책하던 중이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 서넛이 내게 이렇게 외쳤다. 인사인지 장난인지 헷갈리지만, "하이"로 웃으며 받아치고, 유명인사처럼 손까지 크게 한 번 흔들어줬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이라면 이런 상황을 곧잘 겪을 것이다. 나는 "곤니치와"도 제법 듣는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매번 뭐라고 답하고 행동해야 최대한 쿨하게 보일까 고민이다.
- 이번처럼 "하이"라고 인사하며 손까지 흔들어줄 수도 있고
- 앞뒤 설명 없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대꾸해 상대를 당혹스럽게 하거나
- "저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한국인은 안녕하세요, 라고 합니다" 식으로 지루하게 설명을 붙이기도 한다.
- 또 어떤 때는 이도 저도 아닌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이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도 한다.
중국인으로 오해받아서 기분 나쁘더라는 말을 다른 한국인에게서 들었다.
의사소통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이의 표정과 목소리는 물론 행동과 주변 분위기, 당시 상황까지 또 하나의 의미가 되어 전달될 수 있다. 이 한국인이 기분 나빴던 이유는 그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분 나빴다는 당사자는 오히려 덤덤한데 옆에서 듣던 이들이 분개한다.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날 일이라는 반응이다. 인종 차별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처음 만나는 아시아인을 무턱대고 중국인으로 추정하는 건 무례한 행동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기분 나빠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의 국적을 묻는 것이 먼저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국적에 대해 물으면 상대가 곤란하게 여기지 않을까?" 짐작할 수도 있다. "저 사람은 누가 봐도 중국인인데"라고 넘겨짚기도 한다. 중국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중국인에 대한 외부 세계의 오해나 선입관이 연상될 수 있다. 코로나가 전 세계에 공포감을 불러오던 시기에 중국인 대상 폭력까지 있었으니, 중국인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지 모른다.
기분 나쁜 표정이나 행동을 하며 중국어로 인사하거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외국인을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자. 특히 밤늦은 시각이거나 혼자라면 말이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풀어놓은 개가 짖는데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있겠나.
아들의 돌잔치 날로 기억한다. 이 날 손님으로 왔던 한 꼬마가 이렇게 외쳤다. 이 '미국인'의 등장이 인상적이긴 하다. 190cm가 넘는 키에 자전거까지 끌고 우리 집 거실로 들어서는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이 꼬마를 놀라게 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 T다.
한국에서 외국인을 보면 무조건 '미국인'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으니 1980년대 즈음 이리라. 당시 TV에 출연한 한 외국인의 경험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는 "저 미국인 아니에요, 독일인이에요"라고 웃으며 한국어로 대응했다고 한다.
나의 꼬마 시절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2000년 대 초반에도 처음 보는 외국인을 미국인이라 생각하는 꼬마가 있다니 신기했다. 심지어 영국에 살면서도 말이다. 그 꼬마 가족이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외국인이 어울리는 모임에 가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서양인을 모두 미국인으로 간주하던 1980년대 한국인의 시선과 아시아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하는 지금 서양인의 시선은 비슷하지 않을까.
여러 동유럽 국가가 한꺼번에 EU 가입을 하던 해다. 이 시기와 맞물려 헝가리인들이 회사에 대거 입사했다. 근무 부서가 달라서 말을 걸어볼 일은 많지 않지만 오가며 종종 마주쳤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 영국인 동료 J에게 물었다. "너는 헝가리인과 영국인을 구별할 수 있냐?" 그랬더니 J는 생김새만으로는 다른 유럽인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회사를 다닐 때다. 다국적 기업의 광고를 모니터링하는 곳이라 전 세계 언어 집합소라 할 만큼 다양한 인종과 국가 출신이 근무했다. 내 왼쪽에 앉아 일하던 러시아인 P가 갑자기 내 팔꿈치를 찌르더니 속삭인다. "저 여자 한국인 아니냐?" P가 가리키는 사무실 입구에는 한 낯선 여성이 앉아 있었다. 부서에서 새 직원을 채용 중이라 면접을 보러 온 듯하다. 언뜻 봐서는 중국계로 보인다. 중국계 특유의 외모적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그런 언급은 안 하고, 나는 한국인은 아닌 것 같다고만 했다. 아마 P가 내 옆자리에서 2개월간 근무하지 않았다면, 나같이 생긴 사람도 면접을 보러 온 그 여성도 모두 중국계라 판단했을지 모른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만 출신 S가 갑자기 나섰다. "대만 사람이야. 옷차림만 봐도 알거든"
자국민이나 이웃 나라 사람 말고는 상대의 국적을 정확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 큰 키 때문에 같은 한국인 조차 나를 한국인으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자국민도 구별 못할 때가 있는데 이민족 구별은 말해서 뭣하겠나.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P (앞서 나온 러시아인)가 곧 열릴 월드컵에 대해 한창 들떠서 말하고 있다. 축구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던 내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끼어들 만한 이야깃거리인 한국의 지난번 월드컵 개최를 언급했다. 그러자 이 남자가 나를 아주 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한국에서 무슨 월드컵이 열려!"
일본에서 혹은 아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린 적 있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월드컵이 공동 개최라거나 한국에서도 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국인이 제법 있다. P는 검색할 가치도 없는 걸 억지로 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검색 화면에 '2002 Korea Japan World Cup'이라는 문구가 뜨자 P도 나도 모두 얼굴을 붉혔다. 물론 서로 다른 이유에서다.
영국에 살면서부터 한국인이 소수 민족임을 늘 깨닫고 있다.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North Korea냐? South Korea냐?라는 질문에 이어 어느 나라말을 쓰냐?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중국어나 일본어 혹은 영어 중 하나를 쓸 것이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하다 못해 'Korean'의 철자를 몰라서 내게 물어보기도 한다.
영국에서 설문조사나 병원 등록, 회원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할 때면 인종에 관한 질문이 꼭 나온다. 가장 최근 사례라면, 올 3월에 실시된 영국의 인구주택총조사가 있고, 두 차례 코로나 백신을 맞을 때 의료진이 내게 한 질문에서다.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여러 항목 중 어딘가에 'Korea' 혹은 'Korean'이라는 단어가 있겠지 싶어 샅샅이 뒤졌다. 안타깝게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은 있는데 한국은 없다. 인구수는 물론 영국 내 거주 비율만 봐도 앞서 나온 아시아계에 비해 한국인은 소수에 해당한다.
인종에 관한 질문을 수십 차례 받고 나자 이제 인종에 대한 질문만 나오면 길게 이어지려는 상대의 말을 정중하게 끊는다...더 읽을 필요 없어요, 거기 안 나오거든요...그리고 곧바로 당당하게 답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