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식사를 하던 A가 한 말이다.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면 형식적으로라도 맛있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은 있어도, 쌀에 대해서는 대부분 함구한다. 물론 A처럼 대놓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솔직히 맛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생산되는 쌀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리라. 그래서 해외에 살더라도 한인 가정은 대체로 한국 쌀을 고집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르게 사는가 의아해 할 수밖에.
20여 년 가까이 영국에 살면서 적응해온 나도 한국에서 먹던 쌀이 여전히 그립다. 심지어 영국에서 태어나 엄마가 해주는 국적 불명의 음식을 먹고 자란 아들도 일반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쌀이 우리 것보다 훨씬 찰지고 맛남을 안다.
우리 집 식탁에서 다른 건 쌀뿐만 아니다.
내 요리 솜씨도 변변치 못하지만, 한 가지 핑계라고 하면, 한인 마트를 이용하지 않기에 정통 한식을 흉내내기 쉽지 않아서다. 그래서 집에서 음식을 대접할 일이 있을 때, '가능하다면' 한국인과 비한국인으로 분류하여 손님을 초대한다. 한국인이 모이는 날의 메뉴로는 최대한 한식을 피하고, 반대로 비한국인이 모이는 날에는 한식을 내놓는다. 나의 어설픈 요리 솜씨로는 양쪽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기에 최대한 각자의 식생활 배경에서 친숙하지 않은 요리를 내놓기 위해서다.
덕택에 '오, 이거 처음 먹는 건데 맛있네!'라는 찬사가 나오기도 한다. 평소 나의 요리 철학인 '간은 싱겁게, 조리는 간단하게'로 밍밍해진 음식을 가리켜 '이 집은 건강식으로 먹는구나'로 표현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국적을 분류해서 초대하기 힘든 손님도 있다.
바로, 한국인 배우자를 둔 국제커플이다. 이들을 한국인 모임의 날에 초대할지, 비한국인 모임의 날에 초대할 지부터 고민이다. 내 요리의 한계 때문에 커플을 갈라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그렇다 할 수 없지만, 이런 가정의 외국인은 생각보다 한식에 대한 조예가 깊다. 한국이 좋아 한국에서 살다가 한국인 배우자를 만났거나, 한국인 배우자 덕택에 한국 문화에 친숙해진 사람이다. 토종 한국인 못지않게 한국의 맛을 안다. 이들과의 만남 자체는 상당히 유쾌하다. 다양한 문화 엿보기, 해외 살이 실수담, 다문화 가정이 겪는 일화까지 대화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음식 대접만큼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선, 한인 마트가 가깝지 않다. 런던 근교 한인 타운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 반 걸린다. 거리에 대한 개념은 상대적이다. 한 시간 반은 부담스럽지 않다 여길 수 있다. 나 또한 가끔 외식이나 모임을 위해 가는 길이라면 가능하다 본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할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감수하기는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는 되도록 근거리 쇼핑을 선호한다. 어쩌다 한 번 다녀오기도 아니고 식료품 보관 기간을 고려한다면 최소 2주에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다. 왕복 3시간을 매번 도로에 쏟아붓기보다는 더 유익한 일에 쓰고자 한다.
10여 년 전, 한인 마트에 가지 않겠노라 남편과 담판을 벌인 계기도 한몫한다.
남편은 평소에도 계획적으로 장바구니를 채우기보다는 충동적으로 먹거리를 고르는 식이다. 한인 마트에 들어서면 이런 증세가 훨씬 심해진다. 주간 단위로 식단을 짜서 이에 맞게 식재료를 주문하고 냉장고와 냉동고 속 남은 먹거리를 처리할 방안도 고려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남편의 행동은 불편함 그 자체다.
- 아무런 계획 없이 한꺼번에 식재료를 사는 바람에 냉장고와 냉동고가 넘쳐난다.
- 몸에 안 좋은 화학조미료,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과자 등을 너무 많이 사들인다.
- 대용량 포대의 쌀은 집에 보관할 공간도 없고 제때 소비하지 못해 벌레가 생긴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견물생심이다. 안 볼 때는 참을 수 있지만 일단 눈앞에 펼쳐진 진미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가 보다. 식탐이 강한 남편이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평소 우리 가족이 강조하던 효율성 원칙이 한인 마트에만 가면 무참히 무너져버린다.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다, 너무 많아서 다 소비하기 힘들다, 건강에 해롭다, 라고 하는 데도 남편은 자기 고집대로 꾸역꾸역 수레에 담아 온다. 이후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내 차지다.
냉장고의 공간이 부족해, 냉장 식품을 냉동고에 보관하는 일이 발생한다. 두부와 단무지, 각종 반찬, 나물까지. 그러면 냉동고는? 만두와 어묵, 떡가래, 생선 등의 냉동식품도 같은 날 사들였으니 당연히 공간이 부족하다. 한인 마트에 다녀오기만 하면 한동안 우리 가족은 처치 곤란한 음식을 먹어치우느라 바쁘다.
그리고 그 비용은? 한인 마트에 가면 평소 쇼핑 규모에 비해 두세 배는 훌쩍 넘게 소비한다. 남편이 취업하기 전에도 이런 식이라 속상했다. 더군다나 내 입장에서는 필요도 없고 사용마저 꺼리는 화학조미료와 과자, 대형 쌀포대까지 훗날 벌어질 일을 고려하지 않고 사들이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남편은 자신도 요리를 하므로 일부 식재료는 반드시 필요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한 달에 한두 번에 불과하다. 그 기간 동안 내게는 쓸모도 없고 부피마저 큰 물품이 냉장고 한편을 줄곧 차지하다가 상해버리기도 하고, 좁은 부엌 귀퉁이에 세워져 있다가 들락거릴 때마다 내 발치에 부딪히곤 했다.
또한, 시대 변화에 따라 한국 식재료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다.
2003년 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자,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영국 정부가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식료품 수입을 중단했다. 영국 살이 1년도 안 되던 시점이다. 김치에 쓸 액젓을 구하지 못해 걱정할 무렵, 다행히 아는 분이 태국산 액젓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이후 지금껏 나는 태국과 중국산 액젓을 쓰고 있다. 사스 사태가 끝나고 수입품 반입이 정상화되었지만 한국산 식재료 공급은 그후 시기별로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0년, 코로나 시대에 들어서면서 영국 전역에 봉쇄령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외출 제한이 생기고 원거리 이동이 금지되었다. 한 시간 반이나 떨어진 한인 마트에서 정기적으로 식재료를 구하는 가정이라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방법이 좀 다를 뿐이다.
대체 가능한 식재료는 영국의 마트에서 대부분 구한다. 한국과 품종이 다르긴 하지만 쌀과 보리, 현미, 콩 등의 각종 잡곡이 있다. 김치를 제외한 한식 요리에 들어가는 채소도 구할 수 있다. 배추와 무의 경우,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집 근처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채소 가게에서 구매했다. 대부분의 식료품을 배달시키는 지금은, 양배추와 셀러리로 김치를 담는다.
영국 마트에서 구할 수 없는 한국 식재료는, 근처 아시아 식료품점에서 구매한다. 간장과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카레, 짜장, 라면, 미역, 다시마 정도.
이 정도 식재료로 우리가 해 먹는 한식은
라면
미역국
비빔밥
볶음밥
짜장면
카레라이스
닭볶음탕
닭죽
불고기
비빔국수
물국수
칼국수
생선조림
해물파전
가지쇠고기볶음
양배추/셀러리 김치
등이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Jakub Kapusnak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