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가구 할인 행사를 알리는 광고가 흘러나왔다.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는 그런 라디오 말고,
블루투스 기능까지 장착해 놓고 껍데기만 예스럽게 포장한 그런 라디오 말고,
정말 옛날 라디오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옛날 사람은 아닌데...
가구도 관심 없고 세일은 더욱 관심 없었음에도,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문구가 있었다.
* (영국) 법정 공휴일
어, 월요일이 공휴일이었나?
영국에 온 후 반년 정도 비자발적으로 전업 주부로 살던 시절이다. 취업 활동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영국에서 학위를 딴 것도 아니요, 영국에 있는 한국 지사로 파견될 조건도 아니었다. 영어 전공만 믿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곧바로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창시절 이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공백기라 내게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학교를 다니는 남편이 있었으니 그나마 주중과 주말의 개념을 챙기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육아를 하는 입장도 아니고 살림에 치중하는 편도 아니니, 돌이켜 보면 영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만 가지고 매일을 휴일처럼 지내는 세월이었다. 한국과 다른 생소한 문화권에서 내가 맞이하는 공휴일은 다른 직장인들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라기보다 우연히 발견한 선물과도 같았다.
학생 신분이니 나보다는 더 다양하게 인맥을 쌓고 더 넓게 영국 문화를 체험하리라 짐작했던 남편조차 그런 공휴일의 존재를 모르곤 했다.
당시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Bank holiday’가 있구나 막연히 인식했던 것 같다. Holiday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휴일이지 싶지만, ‘Bank’는 왜 들어가나 궁금했는데, 은행이 문 닫는 날에서 유래되었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았다 싶은 게...
잉글랜드/웨일스에는 공휴일이 8개가 있고, 스코틀랜드에는 9개, 북아일랜드에는 10개 (부럽...)가 있다. 올해 5월에 있었던 찰스 3세 대관식을 비롯해, 엘리자베스 2세 장례식, 여왕 재위 70주년 기념식, 왕세손 결혼식처럼 영국 왕실 행사에 맞춰 특별 공휴일이 추가로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공휴일에 Bank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지금처럼 근대적 의미의 공휴일이 없던 시절, 영국의 은행이 업무를 하지 않는 날을 정하면서 이를 기준으로 다른 업체도 휴무하는 날을 서서히 도입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공휴일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빨간 날’이라 부르는 것처럼, 영국에서 공휴일을 '은행 문 닫는 날'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흥미로운 건, 영국의 공휴일이 대부분 월요일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영국의 2024년도 공휴일을 살펴보자.
1월 1일 (월) 신정 (New Year’s Day)
1월 2일 (화) 신정 다음날 공휴일 (2nd January) * 스코틀랜드에만 해당
3월 18일 (월) 세인트 패트릭의 날 (St Patrick’s Day) (대체 공휴일) * 북아일랜드에만 해당
3월 29일 (금) 성(聖) 금요일 (Good Friday)
4월 1일 (월) 부활 주일 다음날 월요일 (Easter Monday) * 스코틀랜드 제외
5월 6일 (월) 초봄 공휴일 (Early May Bank Holiday)
5월 27일 (월) 봄 공휴일 (Spring Bank Holiday)
7월 12일 (금) 오렌지당 승리 기념일 (Orangemen’s Day) * 북아일랜드에만 해당
8월 5일 (월) 여름 공휴일 (Summer Bank Holiday) * 스코틀랜드에만 해당
8월 26일 (월) 여름 공휴일 (Summer Bank Holiday) * 스코틀랜드 제외
12월 2일 (월) 세인트 앤드루의 날 (St Andrew’s Day) (대체 공휴일) * 스코틀랜드에만 해당
12월 25일 (수) 성탄절 (Christmas Day)
12월 26일 (목) 복싱 데이 (Boxing Day)
신정과 성탄절, 복싱 데이, 세인트 패트릭의 날처럼 특정 날짜를 기념일로 정하면서 해당일이 주말인 경우, 익일 혹은 그다음 평일을 휴일로 대체한다. 가령, 신정이 토요일이었던 2022년의 경우 공식 휴일이 1월 3일로 대체되고, 세인트 패트릭의 날이 일요일에 해당하는 2024년의 경우 공식 휴일이 3월 18일로 대체되었다.
대체되는 공휴일마저 대부분 월요일에 해당하니, 8개의 공휴일 밖에 없어도 주 5일 근무 제도까지 더해 토, 일, 월요일까지 3일을 곧장 쉴 수 있어서 연휴가 생기는 셈이다.
연휴를 맞이하는 고객을 노리고자 백화점이 할인 행사를 실시하고 여행 상품이 집중적으로 광고되기 마련이다. 영국의 달력이 생소하게 다가오던 때, 방송 광고를 듣고서야 공휴일의 존재를 내가 알아차린 건 이 때문이다.
영국에서 학생이나 직장인, 프리랜서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니, 우리 가족은 광고를 통해 공휴일을 파악하던 시절과는 딴판이 되었다. 올해는 말할 것도 없고 2024년도 달력까지 미리 챙겨봤다. 아쉽게도, 2024년은 물론 향후 몇 년간 특별 공휴일은 없을 듯하다.
다음번 예상되는 국경일급 왕실 행사라고 해봐야 왕세손인 조지가 결혼하는 날 정도겠지만, 이 꼬마는 이제 겨우 열 살이다.
찰스 3세의 재위 25주년도 당연히 공휴일로 지정되겠지만 2047년도에 해당한다. 그때까지 그가 살아있다면 99세가 된다. 영국에서 최장수 선대왕 기록을 남긴 엘리자베스 2세, 즉 그의 어머니는 96세에 서거했고 아버지 필립공은 99세에 서거했다.
당분간 8개 공휴일로 만족해야겠다. 물론,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조금 더 많지만.
커버 이미지: Photo by Zehra Ö on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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