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 done, Martin"
남편이 부엌 냉장고에서 꺼내온 그릇의 뚜껑을 열자 첫 번째 칭찬과 탄성이 나온다. 전날 밤 양념에 재워둔 닭다리와 양고기가 담겨 있다. 먹음직한 닭다리 색깔과 윤기 나는 표면에 다들 감탄한다. 가지런히 꼬지에 꿰어둔 양고기도 눈길을 끈다.
마틴이 고기를 집게로 들어 바비큐 그릴에 얹었다. 그 모습마저도 대견한지 다들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어쩜 그렇게 의젓하게 고기를 잘 굽느냐고.
고기를 하나씩 뒤집자 먹음직한 향내가 퍼진다.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던 손님들이 자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고기를 한 점씩 맛보자 다들 맛있다며 또 칭찬한다. "정말 맛있네", "최고야"라며 마틴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 아내의 하소연
오늘 음식 제가 다 준비했거든요. 엊저녁부터 고기 다듬고 야채 썰고 양념 재우느라 새벽녘에야 잠들었어요. 손님들이 떠나고 나니, 피곤하다며 먼저 곯아떨어진 남편 대신 뒷정리도 제 몫이네요. 남편은 제가 준비해둔 고기를 꺼내와서 굽기만 했다고요.
왜 아무도 제게는 맛있다, 잘했다, 수고했다는 말 해주지 않나요? 이 양념 어떻게 한 거야, 왜 안 물어봐요?
친구가 온라인에 공유한 짤막한 사연을 내가 길게 각색한 것이다.
위 이야기 속 주인공이 마틴이 아니라 로지였다면 칭찬이 쏟아졌을까? 파티에 다녀본 경험상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남자는 요리 과정에 일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인정해주면서 그 전후 뒤치다꺼리를 다른 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여기 다른 부부의 사연이 있다.
"와, 우리 남편도 요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리 잘하는 남편 둔 거 감사하게 생각해"
"저렇게 설거지해주는 남편이면 나는 맨날 업고 다니겠다"
지인을 집에 초대해 식사하는 날이면 으레 나오는 말이다.
*** 아내의 하소연
저는요, 맞벌이도 아니고 외벌이 아내거든요. 공부하는 남편 대신 생활비를 번다고요. 장롱 면허 출신이 운전 방향도 다른 영국에서 겨우 용기 내어 왕복 두 시간씩 운전해 출퇴근합니다.
평소 집안일도 제 몫이거든요. 계약 서류, 보험 서류, 공과금 고지서 등 문서 관리에다 은행 개설과 자동차 유지보수...이런 일까지 하고요. 영국에서 통장 개설해본 적 있나요? 자동차 문제로 정비소에 들렀는데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직원과 소통해보셨나요? 지속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속에서 잘 들리지도 않지만 사투리 때문에 영어 같지 않은 영어를 쓰는 사람과요?
그런데도 손님 앞에서 요리와 설거지하는 것만으로 남편은 칭찬의 대상이고 저는 남편 귀한 줄 모르는 배부른 여자가 되어야 하나요?
위 사연은 우리 부부 이야기다. 내 브런치 글을 매번 읽는 (감시하는) 남편이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이건 남편에 대한 불평이 아니라 우리 부부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글이다.
부부의 집안일 기여도에 대해 100% 만족하는 가정은 없을 듯하다. 맞벌이 부부라면, 누가 언제 출퇴근하나, 회사에서의 업무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 직장과 어린이집 사이의 거리가 어떠냐에 따라 다양하게 집안일 분배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만 가지고 집안일을 분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집안일은 여자가 하고 남자는 도와준다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박혀서다.
나는 직장인으로 남편은 학생으로 영국에서의 낯설고 바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할 부담은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해외에서의 학위 과정은 의사소통의 불편이 없는 국내에서의 학위 과정과는 다르다. 집안일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불평할라 치면 남편은 자기 코가 석자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학업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는 주변 유학생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나도 남편이 학위를 딸 때까지 참고 버텨야만 했다.
집안일 분담을 두고 우리 부부가 벌인 충돌은, 쉽지는 않지만 서서히 시간을 두고 상호 협의를 통해, 그리고 남편의 졸업과 취업 등 환경 변화를 거치며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의 반응은 부담스러웠다.
남편이 요리를 잘하니 그 정도로 만족하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집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기 남편에 비하면 양호하다는 논리다.
그럼, 그렇게 말하는 분은, 나처럼 퇴근을 하고 와서도 집안일에다 고도의 영어 실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문서 작업까지 하나?...그렇지 않다...전업주부다. 그리고 집안에 필요한 문서는 남편이 담당하는 가정이다. 아내들의 업무 강도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남편들의 집안일 기여분만 비교해놓고 평등을 논하자고?
요리 잘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잘한다는 칭찬에 힘입어 요리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문서 관리를 잘한다고 나보다 못하는 이를 무시해도 되겠는가?
당시 남편이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면
"내가 큰맘 먹고 요리를 하겠으니 A, B, C의 재료를 사놓으시오"
"요리하기 편하도록 주변을 미리 정리해두시오"
"요리하는 동안 다 쓴 그릇이나 주방도구가 나오면 즉각 씻어놓으시오"
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정도면 특급 레스토랑 주방장의 요구사항 아닌가? 이 사람이 요리 좀 한다고 그 정도는 아니다. 남편의 요리는 대체로 짜고, 기름지다. 여자인 내가 했으면 아무도 칭찬하지 않을 수준이다. 현대인들의 건강 식단과도 거리가 멀다. 이런 상황에서 '요리 잘하네'라며 치켜세우는 사람들의 우쭈쭈에 몸 둘 바 몰라하는 남편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남편의 특급 레스토랑 주방장 승격과 동시에 아내인 내가 주방 보조로 전락해야 하는 조건이라면 더욱 반갑지 않다.
무엇보다, 나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편의 태도가 거슬렸다. 나는 요리를 배울 의향은 있어도 남편에게서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남편의 요리 스타일이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요리 블로그가 훨씬 더 유용했다. 요리법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내가 만든 음식도 맛있음을 남편도 인정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나, 찍어 먹나
라면을 꼬들하게 익히나, 푹 퍼지게 익히나
떡볶이에 들어갈 어묵을 세모로 자르나, 네모로 자르나
처럼 개인의 기호에 따라 결정할 일마저 '요리 초보라서 모르나 본데'의 자세로 나왔다.
앞서 나온 마틴과 로지 부부, 그리고 내 남편까지 이제 50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2000년대 초반에 겪은 일화가 이 글의 주요 내용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니 우리 집 주방 풍토도 달라졌다. 지금 신혼을 시작하는 세대에게는 먼 이야기일 수 있다.
제발 먼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cottonbro from Pexel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