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정착해 있으니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지요?

by 정숙진

"버버리 입고 샤넬백 매고 나타날 줄 알았어"


고국 방문 중 남편과 함께 인사드린 자리에서 시가 친척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영국에 사니까 당연히 영국의 유명 브랜드 걸치고 또 요즘 흔히 들고 다니는 명품백과 함께 내가 나타나리라 기대한 모양이다. 이 날 나는 원피스에 청자켓, 배낭 차림이었다. 명품은커녕 브랜드가 뭔지도 모를 품목들이다. 청자켓은 대학 시절부터 입던 옷이다. 공부하는 남편 대신 나 혼자 직장을 다니며 빠듯하게 살던 시절이라 명품은 꿈도 꿀 수 없다. 남편이 취업을 하고 맞벌이를 하면서 형편이 훨씬 나아진 지금도 명품에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숙진이 니하고 이서방이 계산 좀 해라. 어른들한테 대접하면 좋잖아."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모가 우리 부부에게 한 말이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이모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아니면 예상하고 있었는지 미안하게도 남동생이 곧바로 계산했다.


외가 쪽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다. 친정 엄마도 어울리시던 모임이지만 그해 돌아가셨다.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뒤늦게 엄마의 납골당을 찾았다. 내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친척이 모임에 합류하라고 연락을 해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첫해 어머니의 자리에 우리 남매를 초대해준 외가 친척들의 배려에 처음에는 감동했다. 그런데 막판에 이상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나와 전혀 상의도 없이 장소와 시간, 메뉴까지 정한 후 나보고 오라는 통보를 했다. 정규 회원이 아닌 내가 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끼리 회비를 걷어 해결하겠거니 했던 자리에 나더러 몽땅 결제하라고 나왔다. 총무를 맡은 이모가 총대를 잡고 나선 것 같다.


내가 대접하는 자리라면 적어도 장소와 날짜를 정할 수 있는 기회는 줘야 하지 않는가.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자기 참여하라 해놓고 단체로 먹은 밥값을 떠넘기다니. 아무리 친척이지만 그리고 엄마와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지만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남아돈다고 그만 시키라는 외숙모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가 돈이라도 낼 듯 호탕하게 계속 주문하던 외삼촌의 모습이 떠올라 더 눈살이 찌푸려졌다.


모임 장소는 시내도 아닌 산 중턱에 위치한 오리탕 전문점이다. 대부분 60대인 어른들의 구미에 맞춘 건지 몰라도, 접근성을 중요시하는 내 입장에서는 절대 선택할 만한 식당이 아니다. 택시 기사도 위치를 몰라 어정쩡한 지점에 우리 가족을 내려주고 가버렸다.


평소 친척들이 조카인 나를 호구로 삼은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아니라고 본다). 개별적으로 찾아뵐 때면 "타지에 사느라 고생 많지?" 하면서 밥도 사주고 용돈까지 주시던 분들이다.


예상치 못한 단체 식사비 정도는 거뜬하게 낼 정도로 내가 여유롭게 산다고 여긴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친정과 시가 친척을 모두 만나 뵙고 주변 지인의 말도 들어보니, '해외에 정착해 사는 사람은 풍족하게 산다'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고리타분한 얘기로 들리겠지만...세계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빈부격차는 존재한다. 해외 거주 한인도 예외가 아니다.



금수저 출신도 해외에 나오면 빠듯하게 산다


모 방송사 피디의 딸이라더라.

사우디 왕족 출신이라더라.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더라.

재벌가 아들이라더라.


흔히 말하는 금수저들을 영국에서도 만났다. 당연히 이들은 다른 유학생에 비해 풍족한 생활을 한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흥청망청 쓰지는 않는다.


풍족함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해외에 나오면 고국에서 유지하던 소비 규모를 그대로 이어가기 힘들다. 물가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직장인에서 학생으로 신분이 바뀐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영국의 대학은 외국인 학생에게 훨씬 더 많은 학비 부담을 안겨준다.


집에 들어가는 고정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영국은 월세도 비싸지만 매월 내는 지방세 (Council tax)도 부담이 된다. 물가가 비싼 런던이나 그 근교에 집을 구한다면, 주어진 예산으로는 한국에서 살던 집 보다 몇 등급 떨어지는 곳만 가능하다. 주어진 예산에다 개인 돈을 추가해 한국에서와 유사한 수준의 집을 고르는 사람도 있다.


주어진 예산에 맞춰 한국에서보다 소박한 집에 살거나

주어진 예산에 돈을 더 보태 한국과 같은 수준의 집에 살거나


둘 중 어느 경우라도 당사자는 경제적으로 빠듯하다고 느낀다.


내가 처음 영국에 왔던 2003년을 기준으로 전후 10여 년 사이 두 번의 금융 위기가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 가정이 적지 않다. 특히 해외 유학생이 민감하다. 환율 하락으로 인해 고국에서 송금받는 액수가 줄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로 파산하거나 실직한 사람이라면 자녀의 해외 유학을 계속 지원해주기는 힘들다.



현지 기업에 취업하면 고액의 연봉을 받지 않는가?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영국 기업 혹은 국제기구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다. 현지에 정착해 현지 통화로 급여를 받고 생활하는 셈이니 고국과의 물가 비교도 필요 없고, 환율 변동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일도 덜하다.


그런데 해외 기업에 취업했다고 하면 억대 연봉과 최상의 대우를 받으며 스카우트되는 장면을 연상하는 이가 있다. 전공 지식은 물론 한국어와 영어까지 능통한 인재를 서로 데려가려 업체끼리 경쟁이라도 벌였을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파키스탄 출신 남성 알리를 상상해보자.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펀자브어, 영어, 한국어까지 3개 국어에 능통하다.


알리가 이력서를 내밀 때 한국의 기업이 서로 모셔가려 경쟁할까?

같은 분야에 도전장을 내민 한국인 경제학도와 비교해 알리를 더 우수한 인재로 평가할까?


외국 출신을 차별해야 하는 이유는 없지만 서남아시아 등과 교역하는 업체가 아니고는 알리를 더 우대할 이유도 없다. 영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한국어 능력만 가지고 더 우대해줄 영국의 기업은 많지 않다.


모든 영국인이 떵떵거리며 살지 않는 것처럼 모든 영국의 기업체가 억대 연봉을 주는 것이 아니다. 주로 금융계, 법조계, 의료계 등 특정 분야에 해당한다. 대기업이라도 임원을 제외하고는 급여가 정해져 있다.



그래도 해외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한국인이 있다던데?


초등학교까지 한국에서 다니다가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해외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후 현지인과 경쟁한다. 십수 년 전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 그래서 여전히 한국인이라 생각되지만 엄밀히 말해 한국인이 아닌 - 사람들이 금의환향하여 자신의 혹은 자녀의 성공 사례를 들려주다 보니 '해외에서 취업하면 모두가 억대 연봉을 받는구나'로 오해할 수 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ndrea Piacquadio from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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