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지인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각자의 집에서 모임을 주최하던 시절이다. 모인 사람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던 중이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후 다시 거실 쪽으로 향하려던 찰나, 맞은편에 있던 침실의 문이 반쯤 열린 상태로 시야에 들어왔다. 남의 침실을 엿보려 한 건 아닌데 내부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아...
그때...
갑작스레 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충격에 다리 힘이 빠지고 비명까지 지를 뻔했다.
화장대에 놓인 수백여 개의 물체 때문이다.
영화 <미라>의 한 장면이 내 눈앞에 재연되는 것이 아닌가.
분명 화장대인데 그 넓은 공간을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는 건 화장품이 아닌 진회색의 작은 물체였다. 아니다. 어쩌면 화장품도 있었을지 모르나 그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장대 거울에 사물이 투영되어 실제보다 수량이 더 많아 보였을 수도 있다. 혹은, 거울의 각도와 빛 때문에 비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흉측한 물체를 한두 개도 아닌 수백 개나 진열해 둔 이유가 뭘까? 평소 아름다운 미소와 세련된 이미지로 기억되던 A에게서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 모습이다.
혹시, A의 남편 취미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가장 먼저 바라보는 광경이 과연 저거란 말인가?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열린 문틈으로 내부를 다시 살폈다. 자세히 보니 영화 속 풍뎅이는 아니고, 미라와 함께 무덤 속에 묻어두었을 법한 작은 토우처럼 보였다.
사람을 잡아먹는 풍뎅이는 아니지만 무덤 속 토우를, 그것도 수백여 점을 침실 화장대에서 발견하는 것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목격한 건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식용 토우였던 것 같다. 영국을 방문한 기념으로 몇 점씩 사들고 가는 사람도 있다. 하나씩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엽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백여 개의 짙은 색 인형이 한자리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광경은 섬뜩한 공포감마저 줄 정도였다.
이날 모임을 주최한 A는 예상대로 장식용 인형과 그릇 수집이 취미였다. 우리가 앉아 있던 거실의 진열장에도 수집품이 놓여 있었다. 다행히, 혐오스러운 벌레의 습격이 연상될 만큼 빽빽하게 들어찬 인형은 아니고, 밝은 색상과 화려한 문양의 그릇이 공간을 차지했다.
A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으려니 무안해진 내가 한마디 던졌다.
예쁘지도 갖고 싶지도 않은 내 눈에는 그저 그런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예의상 한 말일뿐이다. 그런데, A는 내가 그릇에 관심이 있다고 여겼나 보다. 쓸데없이 꺼낸 말 한마디 덕택에, 한 시간여 가까이 진열장 옆에 서서 그동안 A가 수집한 그릇 한 점 한 점의 구매 역사를 들어야 했다.
이제, 어느 집에 가더라도 그릇과 장식품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으리라!
화장대에 놓인 풍뎅이인지 토우인지, 진회색 물체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다. 대신, 그릇과 장식품 이야기가 끝나니 이제 A의 자식 자랑이 시작되었다. 두 남매 중 딸 하나만 공부를 잘했는지, 아들은 내버려 두고 딸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식이다.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쥐꼬리만 한 월급 밖에 안 주는 나쁜 회사다. 사회 초년생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임에도 원하는 구두를 사지 못한다고 투덜거리는 딸에게 용돈을 보태준 일화를 끝으로 A의 자식 자랑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듣고만 있던 이들에게도 이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려나 했더니, 그 뒤를 이어 자신이 아는 세상의 모든 지식과 종교 이론, 각종 잡학이 A의 입에서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그릇 이야기를 한 시간여나 하고 자식 자랑까지 연이어하면 지칠 만도 한데, 그럼에도 다른 이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날 비로소 깨달은 점이지만, 혼자 말하기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야기 듣는 사람은 안중에 없다는 점이다. 눈은 허공으로 향하여 오로지 자신의 세상 속 그 어딘가에 있을 다른 관객을 위한 독백을 한다. 이번에도 재미없는 공연이 시작되었다. 눈앞에 있는 관객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볼 겨를도 없이, 이 배우는 독백을 이어갔다.
그 지루한 독백을 견뎌야 하는 관객은 중간에 화장실 가기도 힘들다. 라이브 공연 도중 누가 화장실에 간단 말인가? 아까 일찌감치 다녀온 걸로 만족해야 했다.
저기요, 제 이야기는 하나도 안 궁금하세요?
커버 이미지: Photo by Andrea Piacquadio on Pexel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