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원과 모들린 칼리지까지 들렀으니 우리가 참조한 시내 관광 코스의 동쪽 끄트머리까지 가본 셈이다. 이제부터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옥스퍼드 중심가를 향해 가본다.
식물원이 끝나는 지점에 넓은 공원이 나온다.
↑ 크라이스트 처치 메도우 (Christ Church Meadow)
옥스퍼드 시내 외곽을 따라 흐르는 처웰강과 템스강이 닿으면서 생겨난 삼각형 지대에 있는 공원이다.
각기 다른 시기, 다른 지점에서 찍은 사진을 모아 봤는데 아래쪽 사진으로 갈수록 유난히 갈색이 많이 보인다. 작년 여름 영국 전역이 한창 가뭄으로 몸살을 앓을 무렵이다. 초록으로 뒤덮여야 할 잔디가 온통 누렇게 타버려 주변의 흙빛과 구분이 안 된다.
30여 분 정도 처웰강을 따라 걸으며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강을 따라 내려가는 배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가 드문드문 나타났다.
그중 특히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어서다.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상치 않았다.
일행에 비해 사공의 몸집이 유난히 큰 편이 아님에도 어찌 된 일인지 우스꽝스럽다 싶을 정도로 끄트머리에 앉은 사공 쪽으로 배가 크게 기울어져 있었다. 다들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처음 해보는 뱃놀이에 재미가 들렸는지 크게 웃고 떠드느라 노 젓기에도 그다지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저러다 배가 뒤집히지는 않을까, 들고 있던 노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잔잔하게 지나가던 산책 풍경에서 잠시 웃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수심은 그다지 깊지 않으니 큰 사고는 나지 않겠지.
공원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다 두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방향을 돌려보자. 삼각형의 다른 변에 해당하는 템스강을 따라 이번에는 북서쪽으로 올라간다. 2.5km의 거리라 제법 걸어야 하지만, 또 다른 멋진 경치가 펼쳐지고 그 뒤 칼리지 건물이 나타난다.
↑ 크라이스트 처치 (Christ Church)
대학교이면서 성당의 역할도 하는 독특한 칼리지다.
지금껏 13명의 총리를 배출하여 영국의 단일 칼리지로는 최고 기록이다. '해리 포터' 촬영지로도 유명하여 옥스퍼드 칼리지 중 방문객이 가장 많다고 한다. 건물 구석구석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해리 포터 촬영지라는 점은 우리 가족에게 그다지 큰 매력은 없다.
해리 포터가 시리즈로 나오면서 영화 촬영지도 영국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우연히 들렀던 관광지가 해리 포터 촬영지라고 해서 신기해하던 경험도 이미 몇 차례나 겪었다.
혼잡한 공간을 꺼리는 내 성향 탓에 '해리 포터' 특수가 끝날 무렵에나 크라이스트 처치를 다시 방문할 수 있을 듯하다.
크라이스트 처치를 나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백여 미터 가면 우뚝 솟은 타워가 나온다.
↑ 카팩스 타워 (Carfax Tower)
Carfax
* 교차로 (프랑스어)
교차로라는 뜻답게 옥스퍼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시내를 거닐다 보면 이 타워를 수시로 지나곤 하며, 멀리서도 눈에 들어온다.
이 나선형 계단을 아흔아홉 개나 밟고 올라서야 꼭대기까지 다다른다. 당시 나는 치마를 입고 있어서 다니기 민망했으나 다행히 우리 가족 외엔 당장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한 아랍계 여성이 전시 공간에 들어서며 이렇게 외쳤다.
좁은 타워 계단을 빙글빙글 돌며 오르다 보면 중간에 쉼터가 나오는데, 카팩스 타워의 배경과 역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비디오도 상영한다. 아무래도 99개나 되는 계단을 한 번에 오르기란 벅차겠지.
우리는 타워 꼭대기까지 구경을 다 마치고 다시 이 쉼터로 돌아와 한창 전시물을 보고 있을 무렵 여성이 나타났다.
분명 계단이 99개라고 했는데 자기가 올라오며 직접 세어봤더니 76개 밖에 안 된다는 소리겠지. 지금 자신이 서있는 쉼터가 건물 꼭대기라 착각한 듯하다.
"아직 스물세 개 더 남았는데요."
라고 말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딱히 우리를 향해 말한다기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이를 향해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계단 입구에 있는 직원이 들으라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해 외치면서.
이 여성이 놓친 23개 계단을 더 지나야 타워 꼭대기가 나온다. 이곳에 서서 바라본 옥스퍼드 전경이 정말 압권이다. 계단수가 틀리다고 외치던 여성이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는 이 광경을 보았기를 바란다.
잠깐 의문이 들었다.
왜 시내 한 복판에 타워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까?
영국의 중세에 지어진 성과 대저택, 성당 등의 대형 건축물에는 타워가 늘 따라붙기 마련인데, 카팩스 타워는 타워만 덜렁 놓인 형태요 주변 건물과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알고 보니, 1896년에 옥스퍼드가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성 마틴 성당 (St Martin’s Church)의 건물 일부를 철거하면서 지금의 카팩스 타워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 철거하기 전 성 마틴 성당이다. 건물 뒤편에 직육면체로 우뚝 솟은 타워가 지금의 카팩스 타워다.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주변 건물을 정비하고 도로를 확장할 필요는 있다지만,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건물을 부수다니, 나로서는 안타깝게 다가오는 일이다.
전시물을 감상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이렇게 한국어로 외쳤다.
↑ 애슈몰린 박물관 (Ashmolean Museum)
카팩스 타워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박물관이다. 시내 관광 코스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잡았던 옥스퍼드 순교자 기념탑과도 가깝다. 시계 방향으로 도는 여행 경로의 출발점과 도착점인 셈이다.
두 여성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한 시간 뒤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갈 계획이라고 했다. 기차 출발 전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입장료가 무료인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단순히 관람 시간이 부족해 잠시 머물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시아 전시관에서 명나라 도자기를 보던 중 나타난 두 여성은, 내가 청나라 코너로 옮기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떴다. 10분이 채 되려나? 지하까지 총 다섯 개 층에 이르는 박물관을 한 시간 여 만에 돈다고 했으니 우리가 서있던 층에 배정한 시간으로는 적당한 셈이다.
이토록 넓은 박물관을 한 시간 만에 관람한다니 그것도 한 층에 10분도 할애하지 않는다니 안타까웠다. 그 시간이라면 한 층의 전시물만 집중해서 관람하거나 조용한 곳에 가서 다음 여행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애슈몰린 미술·고고학 박물관 (The Ashmolean Museum of Art and Archaeology)이다. 대학 주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주로 그러하듯, 애슈몰린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속 건물에 해당한다.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박물관이라는 점과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 박물관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무더위가 이어지는 바람에 이날만큼은 옥스퍼드 시내를 돌아다니는 대신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꼬박 하루 반을 이 박물관에서만 시간을 보냈는데도 우리가 시작했던 1층 전시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번 기회를 노려야겠다.
시원한 박물관에서 전시물을 관람하며 쾌적한 시간을 보내겠거니 했는데 남편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전시물 보호를 위해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라는 직원의 요청에 따라 남편은 한동안 이러고 다녀야 했다. 가슴께에서 하복부까지 내려오는 배낭의 형상 덕택에 뜻하지 않게 임산부 체험단이 되고서.
임산부 체험을 50대에 그것도 자기 체중도 만만치 않게 나가는 사람이 했으니 얼마나 힘들겠나. 나중에는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결국 지하에 있는 사물함에다 가방을 보관하기로 했다.
* 지금껏 옥스퍼드 시내만 걸었는데 다음번에는 강을 따라 옥스퍼드 외곽을 가보고 다른 박물관도 둘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