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춰 선 남편이 버스정류장 표지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내까지 걸어가기로 해놓고 버스는 왜 확인하지?
뜨거운 태양으로 달구어진 거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남편은 결심한 모양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되던 호텔방에서 했던 약속을 깡그리 무시하기로.
왕복 7km 거리를 단순히 이동 목적에서 매번 오가는 건 무리다 판단한 이 남자는 시위라도 하듯 정류장에 버티고 섰다.
애매한 상황에 이르면 달랑 3명밖에 안 되는 가족이 다수결로 정하자 나온다. 다수결? 좋다 이거야. 그런데, 아들은 왜 맨날 아빠가 하는 건 뭐든 옳소 하고 나오냐고. 두 부자가 늘 짝짜꿍을 맞추는데 나 혼자 당할 재간이 있냐고.
지난 7년여간 남편의 학회와 아들의 방학 프로그램이 이곳에 집중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4차례나 옥스퍼드를 방문했다. 그것도 여름에 두 차례, 가을과 겨울에 한 차례씩, 봄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가본 셈이다.
촬영한 순서가 아닌 내 글의 흐름과 동선에 따라 사진을 배치하다 보니, 그 속에 담긴 계절 색도 다르지만 초등학생이던 아들이 고등학생으로 변신했다가 다시 반대가 되면서 키와 외모가 급변하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덩달아 옆에 있는 부모의 나이와 외관도 급격히 변화하지만 사진상으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으리라 헛되이 빌며 이 자리에 올린다.
영국의 관광지 중에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기 힘든 지역이 제법 있는데, 옥스퍼드만큼은 어느 여행지 보다 접근성이 좋고 걷기 좋은 도시다.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면 쉽게 도달할 수 있고 시내 교통편도 잘 갖추어져 있다.
무엇보다, 면적이 서울의 서초구 정도인 옥스퍼드는 관광 명소와 볼거리마저 학교 주변에 집중되어 있기에, 시내만 들어서면 대부분 걸어 다니며 구경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옥스퍼드 주변을 관광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만하다.
케임브리지에 이어 옥스퍼드도 펀팅으로 유명한 도시다.
Punting
* 펀팅, 긴 장대로 강바닥을 밀어 배를 움직이는 방식 (네이버 사전)
펀팅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사공이 딸린 배보다는 위 영상에서처럼 직접 배를 몰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다만, 저 장대를 중간에 놓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비상시 꺼내 쓸 수 있는 작은 노가 있다.
우리가 지금껏 선택한 옥스퍼드 여행 방식은...
옥스퍼드 시내를 시계 방향으로 도는 코스와
시내를 가로질러 외곽으로 뻗어가는 템스강을 따라 걷는 코스로
두 가지다.
둘의 이동 경로가 거의 겹치지 않는 데다 모두 한 시간 전후의 거리라 부담은 없다.
지역마다 주요 관광 경로를 지도로 표시해 주는 웹사이트를 참조했다. 웹사이트에서 추천한 방식을 무조건 따라 하기보다는 인터넷 지도와 비교해서 코스에 포함되지 않은 주변 명소가 더 있는지, 박물관처럼 단순히 지나치기보다는 직접 들어가 관람할 곳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우선, 시내 관광 코스부터 시작해 보자.
옥스퍼드 시내로 들어서면 버스정류장 근처에 우뚝 솟은 기념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 옥스퍼드 순교자 기념탑 (Martyrs' Memorial)
잉글랜드 최초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메리 1세는 아버지 헨리 8세가 설립했던 국교회를 금지시키고 로마 가톨릭교를 부활시킨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면서 피의 메리 (Bloody Mary)라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로마 가톨릭교를 버리고 국교회를 설립하면서 수많은 이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딸이 로마 가톨릭교를 복원하면서 무고한 생명을 또 죽인 셈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잠시 궁금해졌다.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이 메리 여왕의 별명에서 온 건가? 성계탕을 먹으며 이성계에 대한 울분을 삭이던 개성 사람들처럼?
블러디 메리는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절 뉴욕의 바에서 시작되었다는데,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나와 비슷한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 칵테일을 처음 맛본 손님이 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있다.
위 기념탑은, 메리 여왕의 손에 희생된 인물 중 하나인 '옥스퍼드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메리 여왕의 정책에 반대하다 1555년에 화형 당한 3명의 주교를 가리킨다.
기념탑 주변에도 구경거리가 있지만, 몇 골목 더 내려가 1555년도 사건과 관련 있는 성당으로 먼저 가보자.
↑ 세인트 메리 대학 성당 (University Church of St Mary the Virgin)
천 년의 역사답게 성당이 지니는 의미는 크다.
우선, 앞서 나온 옥스퍼드 순교자에 대한 재판이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영국에서 첫 번째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 옥스퍼드 대학교의 전신이라는 점이다. 중세의 시대적 배경이 그러하듯 교회와 수도원이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이다. 대학의 시초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진정한 대학 교육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 성당에서 1096년부터 교육을 시행한 기록이 있다.
성당을 중심으로 차츰 칼리지가 하나씩 들어서면서 지금과 같은 대학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옥스퍼드 시내 관광 코스로 다시 돌아가보자. 건물 사이에 다리가 하나 보인다.
↑ 탄식의 다리 (Bridge of Sighs)
"어, 다른 지역에도 그 다리가 있지 않나?"
맞는 말이다.
베네치아에 있는 탄식의 다리가 원조인데, 영국에 같은 이름의 다리가 두 개나 있어서 아래에 정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베네치아 탄식의 다리
1603년 완공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연결하는 다리다. 죄수가 다리를 건너는 도중 베네치아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한숨을 짓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케임브리지 탄식의 다리
1831년 완공
베네치아 탄식의 다리를 본떠서 만든 다리로 캠 강 양쪽에 있는 대학 건물을 이어준다.
- 옥스퍼드 탄식의 다리
1914년 완공
베네치아 탄식의 다리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설과 성적표를 받은 학생이 탄식하며 지나간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숙소에서부터 옥스퍼드 시내로 들어와 탄식의 다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쪽으로만 전진했는데, 이 다리에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서관이 나온다.
↑ 보들리 도서관 (Bodleian Library)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서관이다. 참고로, 세계에서 제일 큰 도서관으로 인정받는 대영도서관이 런던에 버티고 있다.
↑ 래드클리프 카메라 (Radcliffe Camera)
보들리 도서관의 열람실에 해당한다.
원통형 건축물에 돔 지붕을 얹은 독특한 구조와 '카메라'라는 이름이 서로 관련되지 않을까 했는데, 건물을 짓도록 재정 지원을 한 '존 래드클리프' 박사의 이름과 라틴어 단어가 붙었을 뿐이다.
Camera
* 방, 공간 (라틴어)
래드클리프 카메라에서 계속 남하하면 앞서 나온 세인트 메리 대학 성당이 나오고, 여기서부터는 도로를 따라 다시 동쪽으로 가보자.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처럼 영국에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학일수록 외부인 출입을 제한하는데, 대학 내부가 궁금하다면 정해진 시간과 요일에 맞춰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여러 칼리지를 다 들어갈 여유는 없으므로 우리는 모들린 칼리지를 선택했다.
↑ 모들린 칼리지 (Magdalen College)
6년 전, 그 많은 칼리지 중 모들린을 선택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옥스퍼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칼리지 건물로 꼽혀서 혹은 근처 식물원과 공원, 강이 모두 자연스럽게 만나는 풍경에 끌렸을 수도 있다.
중세 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보면 내 눈에는 대부분 비슷한 종교적 색채를 띄기에 다른 지역 대학 건물이나 성당과도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옥스퍼드에 있는 모든 칼리지를 탐색하고 나면 모들린만의 특색을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맞은편에 식물원이 보였다. 모들린 칼리지 건물에서 칼리지를 관찰하는 것도 좋지만 식물원에서 칼리지를 바라보는 광경도 멋있다.
↑ 옥스퍼드 식물원 (Oxford Botanic Garden)
화단 뒤쪽으로 모들린 칼리지의 타워가 보인다.
제일 왼쪽, 빅토리아 연꽃은 영국의 식물학자 존 린들리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명칭이다.
가운데, 이집트가 원산지인 파피루스는 고대 문서 역할을 하던 식물로, 종이를 뜻하는 단어 paper의 기원이 되었다.
마지막, 벌레잡이통풀이라는 귀여운 한글 이름에 이어 pitcher plant라는 영어 이름도 있고 nepenthes라는 정식 명칭도 있는 식물이다.
옥스퍼드 하면 '영국에서 최초'라는 기록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바로 1621년에 세워진 식물원이다.
학회에 참석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들어간 곳이다. 정원 문화가 발달한 영국에서 식물원은 특별하다 할 수 없지만 진귀한 열대 식물이 모인 구역에서는, 두 모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는 재미에 빠졌다.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한참 걸었는데 아직 반도 안 돌았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