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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성당을 따라가며 여행하기

by 정숙진

"혹시 1066년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나요?"


노신사가 갑자기 던진 질문이다.


역사 시험을 치르는 중은 아니고, 성당의 역사와 건축 배경에 대해 설명을 듣다가 시작된 대화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성당을 투어 하겠다고 신청했는데 도리어 우리가 질문에 답변해야 하다니 모순이긴 하지만, 청중의 지식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다. 한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유적지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도 없다. 이날 성당 투어를 신청한 사람은 우리 가족 3명뿐이라, 모든 질문과 대화는 우리에게 향했다.


영국의 학교에서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가르칠 때, 1066년은 가장 먼저 언급되는 연도이다 (선사 시대를 비롯해 1066년 이전 내용도 나오지만 이는 나중에 다루어짐). 노르망디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헤이스팅스에서 전투를 벌인 해로, 잉글랜드에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면서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시기다.


영국의 성당에 들어서면 건물 크기와 구조에도 놀라지만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면서도 옛 자취를 어떻게 간직해 왔을까 의문이 들곤 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단순히 예스러운 건물과 웅장한 구조물, 종교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성당 관람의 목적으로 충분하다. 만일, 영국의 종교나 역사, 건축물까지 관심 있다면 성당에서 운영하는 가이드 투어를 신청하면 된다.



성당이냐, 대성당이냐...


Church

* 교회, 성당


Cathedral

* (대)성당


둘 다 영국에서는 성당의 의미가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엄밀히 따지면 대성당에 해당한다.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한 적 없는 나로서는 단순히 건물 크기만으로 일반 성당과 대성당으로 구분한다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가본 대성당은 모두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대성당이 지니는 의미와 역할 때문에 당연히 일반 성당에 비해 더 크게 짓겠지만, 주교좌가 있는 성당 혹은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을 대성당이라 부른다.


대성당 내부를 잘 살펴보면 주변 여러 의자 중에서 유난히 우뚝 솟고 화려한 의자가 있는데 이를 주교좌라 하며, 영국에서는 이 의자가 있어야 대성당으로 간주한다.


Cathedra

* 주교좌 (주교가 앉는 의자)


의자를 뜻하는 이 라틴어가 대성당 Cathedral의 어원이 된 셈이다.


Bishop's_Throne_-_geograph.org.uk_-_641449.jpg geograph.org.uk


↑ 링컨 대성당에 있는 주교좌.


대성당이 지니는 의미는 이보다 더 깊고 복잡할 테지만, 내 이해 수준은 딱 이 정도다. 이 글을 읽는 신자분들, 나의 무지함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그런데, 영국의 성당은 일반 가톨릭 성당과 비교하기 힘든 면모가 있다.



"16세기에 영국의 수도원을 해산한 왕이 누군지 아시죠?"


이번에도 가이드가 던진 질문이지만 확인차 묻는 말에 가깝다.


30여분 이상 투어가 진행되면서, 우리 가족이 외국인치고는 영국 역사에 대해 제법 깊이 이해하고 있다 가이드가 판단한 듯하다. 더 이상 질문이 아닌, '이런 건 알고 있죠?'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영국의 역사가 점차 현대와 가까워지면서 익숙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니 답변하기 수월해졌다. 무엇보다, 바로 얼마 전까지 중등학교에서 영국 역사를 배웠던 학생이 옆에 있지 않은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비 캐서린을 폐비시키고 새 왕비를 얻으려 했던 헨리 8세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다. 결국,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본인이 직접 수장이 되는 잉글랜드 국교회를 설립한다. 성공회의 시작이다. 왕의 뜻에 반발하는 가톨릭 계열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이들의 재산도 몰수한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교회의 교파가 로마 가톨릭에서 국교회로 변경된다. 그렇다고 영국의 모든 성당이 국교회를 교파로 삼는 건 아니다. 1536년에 시작되어 1541년까지 진행된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국교회로 강제로 바꾸게 한 셈이다.



"모든 조각상이 동쪽을 향하도록 누워 있는데, 이 조각상만 반대로 누워 있어요."


이번에는 다른 성당에서 만난 가이드의 설명이다.


성당 곳곳에 주교나 귀족의 유해를 모신 무덤이 안치되어 있었다. 유해가 안치된 석관 위에 고인의 모습을 석상으로 표현한 조각상이 누워 있는 형태다. 성당 내부에 무덤을 모시고 있다니 삶과 죽음, 종교를 모두 하나로 본다는 의미일까?


이들 무덤 조각상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드가 한 조각상을 가리키며 앞서와 같이 지적했다. 동쪽이 태양과 예수를 상징하기에 해가 뜰 때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성당에 있는 조각상은 모두 동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의 조각상은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놓여 있었지만, 성당을 수리하는 도중 조각상을 잠시 다른 곳에 치워뒀다가 다시 제자리로 옮기는 과정에 엉뚱하게 놓였다고 한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물론 그 후손들까지 방향 바뀜에 대해 항의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 그대로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다.


가이드의 설명이 없었다면, 이 성당에 들어와 아무리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더라도 조각상의 방향과 그 의미에 대해, 또 혼자 동떨어지게 누워있는 조각상 위치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을 테다.



500px-lord_kitcheners_tomb_st_pauls_cathedral_london.jpg londonhistorians.wordpress.com


↑ 영국의 전쟁 영웅 허레이쇼 허버트 키치너의 무덤과 조각상이다 (세인트 폴 대성당). 앞서 나온 조각상 이야기와는 무관한 성당이다.



"솔직히 말해, 다들 학교 수업 때문에 여기 온 거 맞잖아요."


동영상에 줄줄이 달린 댓글 내용이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에 관해 조사하다가 찾아낸 영상에서다.


@ William Zeledon


나처럼 단순히 호기심으로 접근한 사람도 있지만, 앞서 나온 댓글처럼 학교 수업 때문에 영상을 찾는 사람도 있다. 교사들이 적극 권장하는 방송이기 때문이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겪은 문화 충격이 한둘이 아니지만, 위 영상이 보여주듯 역사를 대하는 영국인의 태도가 내게는 대표적 충격이다.


침략국의 여유라고 해야 하나...


다른 유럽 강국과 함께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절 영국이 저지른 잔혹하고 비열한 행위는 물론 왕과 귀족이 행하던 양민 약탈, 억압, 학살까지 코미디로 꾸며졌다.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 가진 자의 횡포로 희생된 백성까지 모두 코미디 소재가 되는 셈이다.


HH.png horriblehistoriestv.wixsite.com



제목부터 Horrible Histories...


끔찍하고 잔인한 역사지만,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감사하고 기억하라 가르친다.


영국인의 역사관은 생뚱맞다 싶지만, 길고 지루하게만 다가오는 역사적 사실을 짧은 비디오 한 편으로 익히는 장점은 있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담긴 코미디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 한 나라의 역사를 다 공부했다 할 수는 없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영상으로든 책으로든 여행지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길을 나서면 훨씬 더 알찬 여행이 된다. 성당 투어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여행지마다 영국 특유의 역사관을 지닌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여행의 흥미가 더해지기도 한다.



"이 동네에 성당이 하나 있었네. 그럼 여기 꼭 들러야지!"


지도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여행지를 물색하던 중이다.


세계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성당이 뭐 그리 대단하길래?

우리가 천주교 신자라서?


아니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 그냥 무교임에도 우리는 여행지마다 성당을 찾아다닌다. 영국의 성당이 지니는 매력도 있지만 그 주변에도 볼거리가 많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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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윈체스터 대성당, 솔즈베리 대성당, 체스터 대성당, 웰즈 대성당, 트루로 대성당, 포츠머스 대성당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사진이다.


성당 하나만으로도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물, 예술품 구경에 매료되지만, 수백여 년 전 대성당이 들어설 만큼 종교,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역을 방문하는 셈이다. 성당 근처를 배회하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다. 몇 백 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이 들 테니까.


* 주말 일정 때문에 연재 시기보다 앞당겨 이번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다시 정상적인 요일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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