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월의 또 다른 매력은 서핑에 있다.
서핑 명소로 손꼽히는 세넨 코브 (Sennen Cove)는 영국판 땅끝마을이라 할 수 있는 랜즈 엔드 (Land's End)와 가까워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체 주민이 200명도 안 된다고?
우리가 서있던 해변과 주변 상가에 들어찬 사람만 해도 이보다 몇 곱절로 보였지만, 이 지역 주택의 80%가 실 거주지가 아닌 별장이거나 숙박 시설이라고 한다.
주차장으로 차가 수시로 들락거리고 서핑 보드를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주변이 분주해 보였다. 서핑 전후에 간편하게 걸칠 수 있는 긴 잠바 차림도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유행하던 롱패딩과 유사하지만 패딩이 아닌 얇은 방수 재질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때는 이미 저녁이라 서핑하는 이의 수는 점차 줄어드는 분위기였다. 그 남은 시간에도 일몰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느라 서핑은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
비록 서핑 천국의 진면모를 보진 못했지만 사람과 일몰, 해변 구경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세넨 코브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또 다른 한 가지...
지붕에 앉아 옆건물을 유심히 관찰하던 갈매기다.
이내 도로로 내려앉더니 식당 앞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에게 과감하게 다가섰다. 무심한 듯 다른 방향을 주시하지만 분명 다시 식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국의 해변에 위치한 식당과 카페에는 으레 갈매기 주의보가 내려진다. 사람의 손에 든 음식을 날쌔게 채 버리기로 유명하기에.
갈매기의 탐색전이 진행되는 동안, 마침 서핑을 마쳤는지 젖은 옷차림에 맨발로 걸어오는 가족이 보였다. 개 한 마리도 함께였다. 주인 가족과 떨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개가 노리는 건 바로 갈매기였다.
곧 무슨 사달이 나겠거니, 기다려볼까 하다 이내 포기했다. 남의 불행을 지켜보는 건 내 취미가 아니므로.
식사를 하러 들렀던 펍에서 들은 말이다.
폐허가 된 채광 시설과 바다, 돌, 흙이 전부인 광산 마을을 벗어나니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주택가와 교회, 주유소가 전부였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자 베이지색 본관에 이어 정원에 테이블을 내놓은 펍이 하나 보였다.
미성년자의 출입이 제한되는 일반 술집과 달리, 식사류가 나오는 영국식 술집 펍 (Pub)은 대체로 어린아이 동반이 가능하기에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우리 가족도 자주 이용한다.
운이 좋으면, 지역 특산물도 나오고 지역적 특색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먹거리 하면 늘 조롱거리가 되는 영국에 살면서 특산물이니 지역적 특색이니 하는 말을 강조했다가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8월답지 않게 춥고 습한 날씨에 오전 내내 떨다 온 뒤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저 펍으로..."
그렇게 가족을 이끌고 갔건만, 피로연 때문에 다른 손님을 받지 않는다니.
실망하는 우리 가족을 본 직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 도로 따라 내려가면 펍이 또 있어요."
다행이다 싶어 직원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향했지만, 오늘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건지 아랫동네 펍마저 피로연으로 외부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편의시설을 찾아보기 힘든 한적한 동네다. 이런 곳에서 주말에 잔치를 한다면 위아래 펍이 모두 예약 손님으로 차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차를 타고 시내 중심가로 가면 어떤 형태든 식당이 나오겠지만, 박물관 투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저기나 들어가자고...
식당을 찾아 헤매다 발견한 주유소다.
주유기가 달랑 두 개 밖에 없는 작은 주유소에 딸린 구멍가게지만, 샌드위치 정도는 있겠지 기대했다가 참치 샐러드와 고기 파이, 쿠키, 우유로 만족해야 했다.
"참치와 밥도 있으니 내가 선택한 메뉴가 최고죠?"
"무슨 소리? 쿠키에 우유까지, 탄수화물과 단백질로 균형이 맞지!"
다 같은 고열량 저영양 음식임에도 자기가 고른 메뉴가 더 낫다고 가족끼리 얼토당토않은 품평을 하며 식사를 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의 방과 부엌을 구석구석까지 설명해 주고, 밖으로 나와서는 정원에 마련된 쉼터도 소개해준 호스트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에게 건넨 말이다.
"정말요? 그럼 저 닭도?"
나는 이렇게 대꾸하려다 참았다.
호스트의 말은, 주변 시설을 마음껏 이용하고 구경하라는 뜻이겠지. 그런데, 하필 그가 말을 하며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철망과 기둥을 땅에 박아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그 속에는 낯선 인간의 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모이를 쪼고 다니는 열네댓 마리의 닭이 보였다.
Help yourself...
넓게 해석하면 알아서 하세요, 마음껏 즐기세요, 의 뜻이겠지만, 호스트의 손이 유독 오래 머물던 닭에 초점을 둔다면?
마음껏 드세요, 로 들리지 않겠나. 그럼, 오늘 저녁은 닭으로 해결?
주인장의 말을 엉뚱하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년기를 시골에서 보내며 도축 과정을 몇 차례 목격한 나도 그렇고, '신참이 맨손으로 돼지를 때려잡더라'며 군대 다녀온 남자가 흔히 들려주는 병영 신화를 꺼내는 남편이지만, 살아 있는 닭을 손질할 엄두는 안 났기에.
우리의 콘월 여정은 사실 이 숙소 찾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호스트가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까지 제공하며 친절을 베푸나 싶었다. 그런 자잘한 정보가 없어도 우리는 어디든 잘 찾아가는데.
영국에서 수년간 운전하며 낯선 곳을 돌아다녔지만, 이번처럼 어떤 지도도, 내비로도 찾기 힘든 주소지는 처음이었다. 하얀 오두막이니 계란 판매대니, 이런 생뚱맞다 싶은 정보라도 없었다면 아예 집을 찾지 못할 뻔했다.
주소로만 검색하면 주변 농장과 캠핑장, 호텔, 허허벌판까지 다 뜬다. 이런 곳에 번지수도 없는 형태의 건물로 존재하다니.
그럼에도, 영국의 전원 지역을 여행한다면 시내 호텔보다는 농가에서 운영하는 숙소를 고려해 볼 만하다. 우리처럼 길 찾아 헤매는 수고를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다.
영국의 전형적인 농가에 해당하는 호스트의 집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 현대식으로 지은 건물이 우리 숙소였다. 주변이 숲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밤에는 부엉이, 늑대(영국에 늑대가?) 등 야생짐승의 소리가 들리고 아침에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에 창밖을 내다보니 인기척에 놀란 토끼가 떼를 지어 언덕 위로 도망갔다.
오전 일찍 차를 출발시켜 나오는데 땅에서는 뭔가 후다닥 달려가고 하늘 위로는 휘익 날아갔다. 골목 옆 관목에 숨어 있던 토끼들이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차소리를 듣고 뛰쳐나와서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오가고, 방금 전까지 농장 철조망에 앉아 있던 매가 커다란 날개를 펼쳐 하늘로 솟았다.
일주일도 채 안 되는 시간은 콘월 여행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걷고 싶은 길, 밟고 싶은 해변, 오르고 싶은 언덕과 산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다. 아쉬움을 달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콘월의 아름다움은 이미 수많은 이가 증언했고, 직접 가본 후 가족 모두 흠뻑 빠진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당분간 다시 방문하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뭐가 문제이기에?
우선, 가족 모두가 새로운 곳을 더 많이 여행해 보자는 목표를 지니고 있어서다.
개인적으로, 운전 능력에도 한계를 느낀다. 잉글랜드를 남북으로 이동할 때면 도시를 통과하는 고속도로가 길고 넓게 뻗어 있어 비교적 쉽게 운전하지만, 콘월에 이르는 동서 여정은 남북간 도로에 비해 차선 수는 적고 길도 곧지 않기에 운전이 더뎌진다. 순전히 내 개인적 견해라 할 수 있지만.
해안 도로를 따라갈 때 창밖으로 펼쳐지는 경치는 과연 즐길만하다. 이런 구경도 여행의 일부라 여기는 이도 있어서 일정은 조금 늦더라도 그만큼 가치 있는 여행이라 볼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한달살기를 실천한다면, 내게는 콘월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리라. 이래 저래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다음 여행지를 계획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