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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걱정을 하면 범죄가 된다고요?... 설마

느리게 돌아보는 영국 3 - 본머스

by 정숙진

"겨울이 되면 날도 추워지고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쟤네들 어떻게 사냐?"


울타리 너머에서 열심히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바라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이때다.


"염소 걱정하면 범죄라고 하잖아!"


곁에 있던 두 부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나를 향해 소리치고는 크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얄미운 사람들. 이때만이 아니다. 이후에도 이 남자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같은 소리를 부르짖으며 나를 놀려댔다.


우리가 걷고 있던 언덕길을 따라 드문드문 보이던 염소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내 걱정은 수그러들지 않았기에, 두 남자의 놀림도 매번 자동으로 따라붙었다.


"사람이라면 똑바로 서있기도 힘든 저 절벽 사이에서 어떻게 버티냐?"

"수시로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대는 영국 날씨에 잘 적응할까?"

"겨울이 되면 누가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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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걱정하면 범죄가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그리고 저 염소는 어디에서 왔을까?



goat sign.png pwdirect.co.uk



↑ 이런 류의 메시지가 담긴 경고문이 울타리에 부착되어 있었다. 이를 위반했다고 영국에서 누군가 총으로 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건 주의할 필요는 있다.


'동물 걱정'에 대한 경고문은 염소에서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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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염소든 양이든 동물을 걱정하면 범죄가 된다고?

그럴 리가...

다행히 그런 법은 없다.



Worry

* (개가) (다른 동물, 특히 양을) 괴롭히다 (네이버 사전)



Worry라는 단어에 '걱정하다'는 뜻 말고도 '괴롭히다'는 의미가 더 있을 뿐이다.


영국의 전체 가정 중 31%가 개를 키운다고 한다. 목줄이나 입마개 없이 공공장소에 풀어놓은 개가 사람을 물기도 하지만 가축에게도 피해를 주기에 이런 경고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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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포스터에서 가축 괴롭힘의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축을 향해 짖는 행위, 이들을 쫓아다니거나 물거나 죽이는 행위를 모두 일컫는다. 견주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본머스를 여행할 때였다.


잉글랜드 남부에 위치한 본머스는 런던과의 접근성이 좋고, 아름다운 해변과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기후도 비교적 온화한 편이라 관광지는 물론 휴양지로도 인기가 많다. 인구 이십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소도시에 매년 5백만여 명이 방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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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에게는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한 거리라 이미 몇 차례 방문했지만, 본머스의 야경까지 여유 있게 즐기고자 이날은 숙박까지 하며 해변 도시의 매력을 즐겼다.


본머스의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펼쳐진 언덕을 걷고 있는데, 도로변에 설치된 울타리 너머에 뿔 달린 짐승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염소다. 어린 시절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보았던 염소는 온통 흰색이거나 검은색이었는데, 이곳 염소는 흰색과 갈색이 섞여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 뿔과 수염이 달린 염소다.


앗, 염소가 왜 이런 낭떠러지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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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도로를 지나다 보면 근처 농가에서 탈출한 듯한 가축이 도로변을 배회하기도 하고 차선까지 점유하는 바람에 주변 차량을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광경을 간혹 목격할 수 있다. 일부 국립공원에서는 소와 말, 조랑말, 돼지 등의 가축을 울타리도 없이 방목하기에 이들 동물이 인도와 도로에까지 나와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니기도 한다. 동물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사람과 자동차가 알아서 피해 다니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을 정도다.


이날 본머스에서 만난 염소도 아마 그런 부류의 가축이라 판단되긴 했지만,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은 들판도 도로도 아닌 비탈길이지 않은가.


예전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영국의 비탈길에서 가축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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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모두 각기 다른 장소, 시기에 찍었는데, 양과 염소가 나온다는 사실 외 공통점이 더 있다. 바로, 주변에 비탈길과 풀이 있고, 바다와 가깝다는 점이다. 이들 동물의 신체 구조와 생존 방식이 이런 환경에 더 유리하리라.


무엇보다, 주변 수목의 생장을 위협할 정도로 끊임없이 돋아나면서 영역을 무한정 넓혀가는 풀과 덤불은 양과 염소의 주식이다. 가축이 이런 식물을 먹어치우면서 주변을 정돈하는 효과가 있다 보니 환경 조성 차원에서 지자체가 이들을 풀어놓기도 한다.


영국의 전원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야외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가축이나 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기회가 생긴다. 동물을 관찰하다가 이들이 굶주리지 않을까, 추운 날씨에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까진 좋지만, 괴롭히지는 말자. 특히 개를 동반하고 있다면 사람 못지않게 가축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위 사진을 보니 또 걱정이 된다.



"저 벼랑 끝 염소는 무슨 생각을 하며 거기 앉아 있었을까?"

"농장 한가운데 바윗돌에 올라선 저 염소는 다시 바닥으로 안전하게 내려갔을까?"



이런 말을 내뱉었다가는 우리 집 남자들의 엉뚱한 잔소리가 또 이어지겠지.




우리 가족이 본머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남편과 나 모두 부산에서 성장한 터라 본머스 바다가 부산의 바다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끌리기도 하지만, 나는 부산의 바다와는 다른 매력에도 끌린다.


파란 바다가 있고...

언덕이 있고...

놀이터가 있고...

각종 유흥시설과 식당이 있고...

모래 해변이 길게 이어지는 곳...

(아쉽게도 영국에는 부드러운 모래 보다 자갈이나 몽돌로 된 해변이 더 많다.)


여기까지는 부산의 바다와 유사하지만,


귀여운 염소가 있고...

숲 속 연못과 정원이 있고...

해안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박물관 겸 미술관이 있고...

해변과 시내 주요 명소를 순회하는 거리 열차가 있고...

바다를 감상하며 걸어 지나갈 수 있는 부두가 길게 뻗어 있고...

알록달록한 색채를 자랑하며 줄지어 서있는 해변 별장 (Beach hut)이 있는 곳...


이런 점은 다르다.


아들이 본머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해변에서 모래놀이를 할 수 있어서겠지.

그런데, 지금 아들 나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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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실컷 만끽했던 바다 모래놀이의 즐거움을 아들은 뒤늦게야 누리게 되었다. 이전까지 보았던 영국의 해변은 대부분 자갈과 몽돌만 깔려있어서 모래놀이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쬐끔 부끄러운 나이가 아닐까 싶은, 최근까지도 아들은 모래놀이를 했다. 앞으로도 더 할지 모르겠다. 부모도 같이 하고 싶으니까.


일단 해변에만 들어서면 우리가 무얼 들고 다니든 어떻게 놀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니 괜찮지만, 모래놀이 장비를 들고 해변까지 접근하는 건 별개 문제다. 중년 부부와 고등학생 아들로 구성된 가족이 노란색의 어린이용 장난감을 들고 시내 한복판을 돌아다니기는 망설여진다.


해변에 닿으려면, 주차장 입구에서 출발하여 3km가량 뻗은 정원과 연못을 지나고 각종 놀이시설과 미니 골프장이 있는 광장도 지나야 한다. 뒤이어 카페와 식당 골목까지 통과하는 그 멀고 복잡한 거리를, 그것도 수백 명의 인파로 붐비는 곳을 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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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통 속에 놀이 도구를 숨기고 해변에 잠입하기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아들의 뒤늦은 모래놀이 삼매경을 지지해주고 싶었다.


청소 장비로나 쓰일 물통을 들고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도 웃기긴 하다만, 뭐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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