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돌아보는 영국 2 - 영국의 거리
전동 휠체어를 탄 남성이 우리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점심을 먹은 후 아들과 함께 동네 산책을 나왔을 때다. 지난 몇 년간 남편 혹은 아들을 산책 동무삼아 함께 걸어 다녔으니 모르는 길이 없다 여겼지만 지금 이 사람이 찾는 곳은 처음 들어봤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도 시행되고 있는 도로명 주소처럼 영국의 주소 체계는 Queen's Road나 Oxford Street처럼 도로명으로 구성된다.
비틀스의 앨범 제목인 '애비 로드'는 런던에 있는 도로 이름이다. 앨범 표지 속에서 멤버들이 걷고 있는 도로가 바로 애비 로드다.
영국의 총리 관저이자 집무실인 '다우닝 가 10번지'는 관저가 위치한 도로명과 번지수에 해당한다.
영국식 주소에 '로드'나 '스트리트'가 들어가면 비교적 찾기 쉽다. 도심에서 길게 뻗은 차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큰 도로만 따라가면 자신이 찾는 주소의 도로와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지역 주민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므로 이들에게 물어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평야나 사막 위에다 세운 계획도시가 아니고서야 도시 전체가 장방형으로 길게 뻗은 거리만 나올 리 없다. 언덕길이나 막다른 골목도 있고 독특한 구조의 지형을 따라 반원 형태로 들어선 거리, 토끼굴을 연상시키는 꼬불꼬불한 주택가도 있다. 이런 거리에는 로드나 스트리트 대신 다른 명칭이 붙지만 여전히 도로명 주소 형태다.
우리가 만난 남성이 찾는 코트 (Court)는 그런 거리 중에서도 특히 작은 구역에 해당한다. 아파트 한 동도 채 안 되는 면적도 있다.
아들도 모른다고 했다. 마침 휴대폰을 챙겨 오지 않아 지도로도 확인해 줄 수 없었다.
길을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답하고 자리를 뜨면 그만이지만, 이날만큼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처에 작은 슈퍼마켓과 식당 하나만 있을 뿐 오로지 주택가로만 형성된 동네다. 지역 주민과 방문객, 배달하는 이가 드나들 때 말고는 차량 진입도 적은 편이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와 산책하는 사람, 유모차나 개를 끌고 가는 사람만 간혹 보일 정도다.
마침 이날은 8월 무더위로 인해 폭염 주의보까지 내려졌다. 평소에도 한산한 거리가 아예 텅 빈 느낌이었다. 아들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면 우리더러 미쳤다 하지 않을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때 우리 말고 길을 가르쳐줄 이가 금방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휠체어에 타고 있는 사람이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과도하게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되겠으나 이 남성의 행동이 나를 계속 불안하게 만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왔는지 한 손에는 음식이 가득 담긴 봉투를, 다른 손에는 신용카드를 쥐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휠체어 조작 버튼과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리고 누르느라 두 손이 쉴 틈 없었다. 남성의 오른발마저 발판 밑으로 계속 미끄러져 곤란을 겪고 있었다. 휠체어를 한 번씩 멈추고 손으로 다리를 당겨서 미끄러진 발을 제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자리를 뜨려는 남성을 향해 내가 다급해진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두 모자가 길잡이로 전혀 도움이 안 되겠다 판단했는지, 이 사람은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나려던 참이었다.
아들까지 가담해 둘이서 끈질기게 남성을 막아서며 설득하자 내키지는 않아 보이지만 우리를 따라나섰다. 그가 부담을 느끼거나 우리의 의도를 의심할까 봐 '저희 하나도 안 바빠요. 어차피 우리 산책하던 길이잖아, 그렇지?'라며 옆에 있는 아들에게 억지 동의까지 구했다.
아무리 생소한 주소라도 접근 도로만 알면 찾기 수월해진다. 그런 도로라면 동네 주민인 우리가 알만한 이름이니. 코트 말고 주변 도로 이름을 아느냐 물었더니, 남성이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도로를 모른다고 했다.
우리에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은 대부분 동네를 처음 방문하는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거주자다. 다 큰 성인이 자기 집 위치를 모르다니, 보통 상황에서라면 웃을 수도 있지만 이 남성에게는 사연이 있을 듯했다.
그가 사는 건물은 최근 새로 지어진 양로원이라고 했다.
아...
그제야 이 남성이 찾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되었다.
진작 말해주지.
7, 80대 노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양로원이라는 이름이 지금 내 앞에 있는, 기껏해야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사람과는 무관해 보였다. 물론, 양로원 입주 요건도 모르고 남성의 나이도 모르면서 내가 어떤 판단을 하겠나.
우리가 자주 다니던 길 건너편에 양로원이 하나 있긴 하다. 폐건물이 있던 자리에 어느 날 고소작업차가 들어서고 대형 트럭이 들락거리더니 사람들이 무언가를 부수고 다시 쌓아 올리는 광경을 산책 도중 목격했다. 바로 몇 개월 전에는, 건물 진입로에 기우뚱하게 서있는 나무의 가지를 베어내는 작업을 하느라 근처 도로가 차단되기도 했다.
이 건물이 양로원임을 아는 이유는, 간판에 그렇게 표기되어서가 아니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작업장 주변을 보호막으로 둘러싸고 새로 들어설 건물에 대한 안내문과 광고 사진을 벽에 크게 붙여 놓아서다.
우리가 향하던 길 한복판에 갈색 고양이 한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식빵을 굽고 있었다.
산책길을 돌다 보면 하루에 적어도 십여 마리의 고양이와 곳곳에서 마주치곤 하는데, 이날 본 고양이는 조금 특이했다.
주변이 온통 뜨겁게 달구어져 걷기도 힘든 그 무더운 날, 길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니
웨앵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거대한 금속 물체와 인간 3명까지 다가오는데 겁도 안 내다니
보통 고양이가 아니군.
버티는 고양이를 피해 옆으로 돌아가거나 도로변으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인도로 뛰어오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그런 식으로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고양이가 차지한 자리를 통과해야만 했다.
고양이에게 다가가 정중히 말을 걸며 꼬드겨보았다. 그랬더니 이 녀석 꼼짝도 안 한다.
등을 쓰다듬어 주며 살살 달랬더니 살짝 몸을 누그러뜨리는 듯해도 여전히 꼼짝도 안 한다.
이번에는 남성이 다가가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가 한층 더 누그러진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꼼짝도 안 한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내가 협상을 재시도하던 중 고양이가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서 살짝 들어 올려 옆길에 내려줬다.
고양이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앉았던 길을 겨우 통과해서 주택가를 벗어나자 큰 도로가 나왔다. 건너편에 익숙한 건물이 보이자, 남성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동네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남성이 거주한다는 양로원도 찾아봤다. 건물 입구에 양로원이라 표기해 두면 좋으련만, 아마 그러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
이제부터 산책하면서 동네 주변을 제대로 탐방해 봐야겠다.
그동안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존재를 몰랐던 작은 골목이 있나 들여다봐야지.
길 찾는 사람을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경험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다.
더 친절한 주민이 되고 싶기도 하다.
동네 여행 시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