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돌아보는 영국 1
또 시작이군.
여름휴가에 갈만한 여행지를 내게 찾아보라 해놓고 남편이 한소리 하네요. 가족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여행지 선택에서 일정 관리, 각종 예약까지 거의 다 제가 도맡아 해왔거든요.
가족 중 누구도 이런 제 역할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잘 따라주는 편이지만, 남편은 일단 딴죽부터 걸려고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기에 제가 총대를 메었을 뿐인데 말이죠. 누구든 더 좋은 의견을 내면 계획에 반영하곤 했지만, 이 남자는 매번 똑같은 패턴의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잉글랜드 남부에 사는 저희 가족에게 스코틀랜드 여행은 늘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에다 남편이 원하는 일정까지 보태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세 번이나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도 편도 여행으로만.
집과 최종 목적지를 지도에 찍어놓고 둘 사이를 이어주는 선 주변에 보이는 익숙한 지명의 장소는 모조리 가봐야 한다는 남편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봅시다.
월요일, 오전 일찍 집에서 출발 (8:30)
코츠월드 도착, 사진 찍고 다시 출발 (11:00)
셰익스피어 생가 도착, 사진 찍고 점심식사 후 다시 출발 (13:30)
리버풀 도착, 사진 찍고 다시 출발 (17:00)
블랙풀 도착, 사진 찍고, 차 주유하고, 저녁식사 후 하룻밤 묵고 화요일 출발 (8:30)
화요일, 레이크 디스트릭트 도착, 사진 찍고 다시 출발 (10:30)
에든버러 도착 (13:00)
점심식사 후 에든버러 여행 시작 (14:00)
이 정도 일정이라면 제가 애초 세운 계획에서 1박만 추가하면 되지만, 저의 느린 여행 감각으로는 도저히 따라가기 힘듭니다.
제가 추구하는 여행은 휴식이나 식사, 주유가 필요할 때만 경유지를 들르고 나머지는 오로지 최종 목적지에만 집중하는 식입니다. 남편과 제 방식, 그 어느 것이 더 좋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죠. 저처럼 단순한 여행 반경에서 느리게 다니는 여행자가 있는가 하면, 남편처럼 더 넓고 더 빠르게 더 많은 여행지를 다니려 하는 이도 분명 있으니까요.
어쩌면, 목적지 한 곳에만 일정을 다 쏟는 제 방식이 너무 단조롭다 여길지도 모르죠. 그러면 저는 이런 의문을 가져봅니다. 낯선 도시에서 사진만 찍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바엔, 굳이 여행지로 선택할 필요가 있을까?
어찌 되었건, 남편은 저를 만나기 전 그렇게 여행 다녔노라 하고, 다른 이들의 여행담을 들어봐도 비슷한 성향이 제법 있더군요. 사람마다 여행 목적이 다르고 선호하는 여행 방식도 다르므로, 제 의견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배 여행자의 경험을 들어보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답변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이들의 여행담을 들어볼까요.
첫 번째 선배는, 물때가 되면 육로가 막히는 섬 도시를 급하게 둘러보느라 뭘 구경했는지는 모르지만, 물 들어오는 시간을 깜빡하는 바람에 그 추운 날 신발과 양말을 벗고 급하게 뛰었던 추억만 남았다고 합니다.
다른 선배는, 손님이 올 때마다 근처 박물관을 데리고 간 경험을 말하는데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방문해도 지금껏 기억에 남는 전시물이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 선배는, 자동차로 유럽 전역을 돌고 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도시도 끼어 있길래 그곳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딘가로 한참 갔더니 웅장한 건물이 나오고 화려한 공원이 펼쳐지고 예쁜 집이 있더라.'는 식으로 답하더군요. 어느 나라의 어떤 도시, 어디에 있는 명소... 이런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여행지를 추천해 줄 것처럼 서두를 꺼내놓고는 저더러 도대체 어디를 어떻게 가라는 소린지.
물론, 제 여행담에도 불만의 소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제 여행 철학이 설득력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가족과의 여행에서는 제 방식이 통합니다. 여행 계획을 공개할 때마다 딴죽을 거는 남편조차, 여행지 도착과 함께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듯 찬찬히 둘러보는 여행의 매력에 누구보다 먼저 빠지거든요.
무엇보다 제게는 든든한 아군이 하나 있습니다.
호기심 많은 아들은 어느 여행지를 가더라도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읽어보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낯선 도시를 단시간에 훑어보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식으로는 만족할 수 없겠지요.
잉글랜드 북동부에 살던 가족이 차츰 남하해서 지금은 잉글랜드 남부까지 내려와 살게 되었습니다.
수차례 거주지를 옮겨 다니다 보니 다양한 지역의 문화적 특색도 경험하고 여행 반경도 차츰 넓히게 되었습니다. 같은 영국이라도 조금씩 다른 색깔을 찾아낼 때마다 제 일기장에 또 블로그에 나중에는 이 브런치에다 일부 내용을 끄적이곤 했습니다.
지금껏 영국의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정작 여행 이야기는 제대로 해보지 않은 아쉬움이 남더군요. 영국인과 영국 문화 소개에만 치중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 소재를 직접 제공했던 여행지에 대한 소개는 소홀히 한 셈이죠.
그동안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라 고민만 하던 이야기를 이 자리에 공개할까 합니다.
여행 이야기라고 해서, 맛집? 핫플레이스?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가느냐 보다는, 마음 잘 맞는 친구와 걸으며 가볍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작은 도시 하나를 천천히 걸어보고 현지인에게 물어보고 검색도 하고 안내문을 읽고 실수도 하고 책으로 공부하고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동물, 진귀한 구경거리, 독특한 영국 문화도 소개하고요.
참...
이야기 주제와 맞겠다 싶어 선택한 사진 속 제 아들이 갑자기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여행 순서도 아니고 동서남북 그 어느 순서도 아닌, 제 머릿속 추억이 떠오르는 대로 쓴 여행담이니까요.
다음 주부터 기대하세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