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맞긴 한 걸까?
10분 넘게 차를 몰고 갔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라곤 수확을 끝낸 텅 빈 들판뿐이었다.
도로라고 하기엔 너무나 좁고 인도라고 하기엔 외부와 차단되어 휑했다. 바닥 상태도 말이 아니다. 소달구지나 끌고 가면 어울릴 듯한 흙바닥에다 딱 그 정도 폭만 남겨두고 모두 주변 농토에 양보한 상태였다. 바닥 곳곳이 자동차 바퀴에 파이고 자국 그대로 굳어버린 지점도 있고 물까지 고여 진흙탕이 형성되기도 했다. 자칫 구덩이에 빠져 차를 빼내지 못할까 두렵기까지 했다.
내비에서는 이 길이 맞다고 알려줌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오도 가도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며 탈출구를 찾아 헤매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지던 중 갑작스레 목표물이 나타났다.
철기 시대 유적지 '칸 유니'.
'Carn'은 콘월 지역 언어로 돌무더기를 뜻하고 'Euny'는 성인 (聖人)을 가리킨다.
드넓은 콘월 땅의 10분의 1도 닿지 못할 일정임에도, 이 자그마한 공원 하나를 보기 위해 우리가 이토록 어렵게 찾아온 이유는 단순하다. 우선, 이처럼 접근이 까다로우리라 예상치 못해서다. 공원 반대편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있었지만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정비가 덜 된 길을 달리느라 차와 사람까지 고생했어도, 가족 모두 유적지에 관심이 많고 숙소에서 가깝다는 점도 방문 이유로 충분했다.
철기 시대 흔적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인지 문명의 손길은 최소화시킨 공원이었다. 이런 흙과 돌 투성이 공간에 과연 주차장이라도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작으나마 주차할 공간은 있었다.
공원 입구를 막 들어섰을 때다.
맞은편 언덕에서 한 남성이 내려오는데, 그가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기다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기이하게 생긴 물체를 보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물체를 짊어진 이의 등장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낚싯대처럼 생긴 기다란 막대 끝에 넓적한 판이 달려 있는 형태였다.
생소한 막대의 정체를 머릿속에서 궁리하다가 순간적으로 내린 결론이 금속탐지기였다.
나의 엉뚱한 추리 덕택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웃긴 했지만 나는 좀 더 복잡한 이유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금속탐지기라는 결론에 이어
"탐지기를 왜 가지고 다녀요?"
"오늘은 뭘 찾았어요?"
라는 추가 질문까지 그 짧은 시간 안에 구상해 놓고 기다렸건만 기대와는 전혀 딴판의 답변이 나와서다. 금속탐지기와 휴대용 잔디깎이도 구별 못하는 내 무능력에 무안해질 수밖에 없지만, 따지고 보면 둘 다 유사하게 생긴 데다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물품은 아니라 혼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싶었다.
둘의 실물 사진을 비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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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들고 있던 막대는 진흙과 풀이 엉겨 붙어있어서 끄트머리가 칼날이었는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위 오른쪽 막대를 금속탐지기라 소개해도 나는 믿었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가 서있던 곳은 한국처럼 조상님 산소를 모실 만한 땅도 아니요 텃밭이나 정원으로 가꿀만한 사유지도 아니다. 이런 곳에 누군가 이른 아침부터 풀을 깎으러 오리라 예상하기는 힘들지 않겠나.
현실판 인디아나 존스가 내 앞에 나타나 멋진 발굴 스토리를 들려주겠거니 했던 기대는 접어두고,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다.
어렵게 찾아낸 볼거리치고는 밋밋하다 할 수 있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주변에 사람 하나 없고 편의시설도 갖추지 않은 공원은 마치 왕릉을 파헤쳐놓은 듯 스산함마저 감돌았다. 주차장 규모로 봐서는 관광객이 단체로 몰려와서 한꺼번에 둘러볼 만한 공원도 아니었다.
영국의 대표 관광 명소로 꼽기는 힘들겠지만, 우리 가족이 다니는 여행 경로마다 이런 작은 유적지 하나쯤은 늘 포함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날 들렀던 공원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느 명소 못지않게 오랜 역사와 시대적 의미를 지녔기에 소중하게 돌아보던 중이었다.
공원에 설치된 표지판을 살펴보던 중 제일 밑바닥에 위치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흡연과 상업적 촬영, 금속탐지 행위를 금합니다.
금속탐지 행위라...
철기 시대에 시작되어 로마 시대 말기까지 이어진 주거지인만큼 고대 유물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발굴된 유물도 있을 테고 앞으로 더 발굴이 진행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그칠 줄 모르리라. 보호막도 감시인도 없는 공원에서 누군가 무단으로 유물을 파헤칠 위험이 있다. 유적지 보존을 위해서라도 금속탐지기 사용을 금할 수밖에 없다.
낯선 남성에게 내가 무심결에 던진 말이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니었던 셈이다. 주변 땅을 파내면 철기 시대든 로마 시대든 유물을 발견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장소에 금속탐지기로 오인받을 만한 물체를 들고 오다니...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콘월주(州)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로 잉글랜드 최서단과 영국 최남단이 모두 위치한다. 면적은 울산의 3배가량이지만 인구는 울산의 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인구 밀도는 낮은 편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덕택에 영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해양 관광지로 꼽힌다. 2021년 G7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영국에 살면 꼭 가보라고 누구나 권하다 보니 어떤 곳인지 정말 궁금했다.
과연, 지금껏 내가 영국에서 가본 여행지 중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라기보다, 같은 영국 땅이면서 영국다움과 영국답지 않은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다.
콘월의 매력을 꼽으라고 하면...
잉글랜드 최서단에서 맞이하는 일몰을 빼놓을 수 없다.
소행성 B612에 사는 어린 왕자는 한번에 마흔세 차례나 해지는 풍경을 본 적 있다고 하는데, 지구에 사는 나는 마흔세 차례까지는 아니고 하루 몇 차례 일몰을 지켜보았다.
지구인이 하루 만에 일몰을 몇 번이나 보다니 터무니없는 소리겠지만, 해가 아직 남아 있다 싶은 때 장소를 조금씩 옮겨가며 해를 관찰해서다. 언덕을 조금 더 걸어 내려가도, 해변을 따라 걷기만 해도 해의 모양과 색깔은 달라졌다. 다음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해의 위치와 빛깔은 다르니까.
이제는 폐광이 되긴 했지만, 구리와 주석 채광지로 유명했던 광산 마을을 방문하는 것도 콘월 여행의 묘미가 된다.
콘월에서 구리와 주석을 채굴한 역사는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청동의 주재료가 구리와 주석이므로 가능한 일이다. 박물관으로 개조한 광산 마을에서 콘월의 지질과 채광 역사, 채광 현장, 제련 시설도 둘러보고 전문가의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광산 마을의 매력은 이런 채광 흔적을 둘러보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드 시리즈 '폴다크' 팬이라면 위 풍경이 익숙하지 않은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라는 건 알았지만, 촬영지가 콘월이며 특히 위 광산 마을이 주요 배경이라는 사실은 이번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바다와 접해 있는 암벽이 파도에 차츰 깎이면서 바위 내부에 포함된 광물이 고유의 색채를 드러내어 다른 해안가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도 연출된다.
바닷가 절벽에 채광 시설이 세워져 있기에 가는 곳마다 해안 절경이 펼쳐진다. 근처에 돋아나는 각종 식물과 꽃구경도 또 다른 재미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야생화도 있고 부리와 다리가 붉은빛을 띠는 까마귀도 만날 수 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