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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Nov 22. 2022

월드컵 하면 생각나는 9년 전 아들의 메모

"XX아 뭐하냐?"


아들이 종이에다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3년 12월의 일이다. 거실에 켜 둔 TV 화면에는 다음 해 열릴 브라질 월드컵을 대비한 조 추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들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메모를 시작했다. 참고로, 당시 한국 시각으로는 12월 7일 새벽이지만, 영국은 12월 6일 오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아들이 편안하게 생중계로 볼 수 있었다.




한국과 같이 H조에 속한 국가는 물론 한국의 첫 경기 상대 국가까지 표시되어 있다. 초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지만, 영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느라 또래에 비해 한국어가 어눌한 아홉 살짜리의 솜씨임을 밝혀둔다. 벨지엄, 알제리아, 러씨아... 이렇게 한국어 표기와 다르게 적었는데 방송에서 들은 대로 아들이 표현한 것이리라. 


당시 TV 화면에 크게 집중하지 않은 탓에, 국가가 하나씩 발표되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내겐 기억이 없다. 어쨌건, 혼란스러운 한국어 솜씨로 국가명을 하나씩 받아 적고 추가 정보까지 넣어서 그럴듯한 자료처럼 꾸미기 위해 아들이 엄청나게 집중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에 아들이 이토록 정성을 쏟은 이유가 뭘까?



"아빠요, 지난주 월드컵 추첨 결과 안 봤지요? 내가 적은 거 보세요."


며칠 뒤 집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아들이 자신의 메모를 내밀었다. 


브라질에서 생중계로 열리는 조 추첨의 날, 남편은 집을 비웠다.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이 출장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인터넷과 TV, 라디오도 없는 오지 마을이 아닌 타 도시로 말이다. 기차를 타고 출장지로 향하고 그곳에서 현지 관계자를 만나고 호텔에도 머물며 TV도 보고 스마트폰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다.


아홉 살 아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풍경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과 함께 TV를 보지 않았으니 그리고 일하느라 바빴으니 아빠가 조 추첨을 놓쳤겠거니 싶었나 보다. 그러니 이를 기록으로 남겨서 아빠에게 보여줘야겠다, 그 생각밖에 없었던 셈이다. 축구광인 아빠가 월드컵 조 추첨 소식을 못 들었을까 걱정되어 말이다.


메모를 보며 아들을 대견하게 여기는 한편, 우리 부부 모두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커버 이미지: bbc.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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