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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Jan 05. 2023

고등학생 아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쳐보았다

"이번 휴가 동안 가족 프로젝트에 쓸 물품입니다."


지난달 초, 집으로 배송된 택배 상자를 열어본 두 부자에게 내가 한 말이다. 상자에서 나온 물건을 본 남편과 아들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내가 뭘 주문했냐면








바로 이 두 가지. 


곧 쉰을 바라보는 여자가 인형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니, 가족 프로젝트라고? 그럼 온 가족이 모여 인형놀이를 한다고?

또, 저 천조각은 뭐지?




우리 가족의 겨울 휴가는 꽤 길다. 


우선, 영국의 달력에는 12월 말과 1월 초, 단 2주 사이에 공휴일이 세 개나 끼어 있다 (스코틀랜드 제외). 또한, 학생들의 방학도 있기에 직장을 다니는 학부모는 여유만 된다면 이 시기에 휴가를 낸다. 남편은 휴가를 길게 쓰지 않는 편인데 코로나 영향권에 살면서 운신의 폭도 좁아지다 보니 더더욱 휴가가 남아돌았다. 그래서 2022년 한 해가 가기 전 휴가를 다 쓸 요량으로, 또한 아들의 겨울 방학과도 맞추다 보니 남편이 회사 일을 하지 않는 날이 2주 반 가량이나 이어졌다.


주변 눈치 안 보고 길게 휴가를 쓰는 영국인조차 한 해 마지막 달 이 정도로 길게 휴가 내기는 힘들다. 이미 상반기에 휴가를 거진 다 써버리니까. 


우리 가족은 근처 도시로 잠깐 다녀오는 것 말고는, 이런 긴 여유에도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다. 춥고 습한 영국의 겨울 날씨에 자동차든 비행기든 이동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집에서 보내는 겨울 휴가에 어느 정도 적응해서다. 


가족의 주말과 휴가, 여행 계획을 주로 내가 짜다 보니 이번에도 내가 나섰다. 오전에는 각자가 추구하는 일에 집중한 다음 정오가 되면 다 같이 모여 식사 준비를 하고 밥을 먹으며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또 그 이후 청소를 하거나 산책을 다녀오는 것이 우리 가족의 겨울 휴가 일상이다. 그리고 중간에 두세 차례 정도 외식도 하고, 크리스마스 당일과 한 해 마지막 날은 놀이에만 집중한다. 여기까지는 예년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런 밋밋하면서도 여유로운 일상이 2주 이상 펼쳐질 것임을 알기에, 가족 모두가 개인적으로 할 일을 미리 정해둔 상태다. 남편은 프로그램 언어를 이번 기회에 습득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인터넷과 책을 파며 집중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덕분에 업무에 요구되는 프로그래밍 기술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작년 9월, 대학 준비반에 진학한 아들은 4개로 줄어든 입시 과목을 공부하는 가운데, 만 17세에 가능해진 운전면허 이론 시험도 준비했다. 또한, 월드컵 결승전을 본다고 또 체스를 한다고 친구들과 모이기도 했다. 나는 휴가가 별도로 주어지지 않는 프리랜서답게 중간에 조금씩 번역 일을 하면서도 책을 더 많이 읽고 글을 더 쓰고 또 가족의 휴가 진행사항을 점검하면서도, 오히려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듯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오전에는 각자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더라도, 나머지 시간에는 가족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지 않겠나. 이번에는 여유 시간도 더 늘어나고 아들도 더 성장했으니 색다른 과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느질 강습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내놓을 때면, 특히 이번처럼 우리 집 동지들의 협조를 받기 힘겨울 수도 있겠다 싶으면, 나름 꼼꼼한 사전 준비를 거친다. 상대가 보일 거부 반응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특히, 장비빨 따지는 남자들을 겨냥하려면 돈도 어느 정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내놓은 것이 겨우 바비 인형이랑 천조까리냐고 누가 따진다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아들에게 바느질 강습을 해주겠다 결심한 건 단순한 이유에서다. 초등학교에서 몇 차례 기본 바느질 수업을 받았지만 그 세월도 한참 지나 아들이 혼자 독립해 나가 살면서 제대로 바느질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서다. 낡은 옷을 수선하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일에는 이제 아무도 신경 안 쓰는 시대가 되어서도 말이다. 요리와 청소에 이어 바느질까지 정식으로 가르쳐주지 않고 더 이상 스스로 익히지 않아도 되는 낡은 기술이 되었다 해도, 당장 무시할 수도 없는 기술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어렵고 지루하게 익히는 것이 아니라 길고 긴 휴가 동안 집에서 온 가족이 참여해 재미로 배워보자는 취지다. 그래서 조금 돈이 들더라도 인형과 천조각을 주문했다. 집에 남아도는 자투리 천만으로도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만 아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또한 가족 프로젝트에 늘 바람잡이로 초빙되는 남편에게도 무언가 제시할 구실이 필요했다.


물론, 아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겠다는 목적 말고도, 나의 숨겨진 의도는 하나 더 있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싸구려 인형에다 옷을 만들어 입히던 시절,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바비 인형을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가져보는 소망 말이다. 


진땀을 빼며 바느질에 집중할 아들과 남편 앞에서 '내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지'라고 말하며 멋진 새 옷을 걸친 인형을 내놓으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꿈이 있었노라 고백하는 건 생략하기로 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노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 솜씨 때문이다. 뭐 어쩌랴. 40년 간 포기하고 있던 꿈을 이제야 부활시킨다고 없던 실력이 갑자기 솟아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이번 강습은 옷 만들기가 아닌 바느질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지 않은가. 첫 번째 목적인 아들의 바느질 익히기라도 무난하게 진행된 것에 만족해야지.



겨울 휴가 동안 다섯 차례 실시한 바느질 강습 풍경



내가 주문한 인형과 천조각을 보며 당황해하던 아들이지만, 바느질 강습에는 진지하게 참여해 주었다. 박음질과 시침질, 단추달기 정도만 가르친 셈인데 혼자서도 흥미를 가지고 옷의 형태를 갖추고 바느질을 해냈다. 조금 이해하기 힘든 패션이지만...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다는 엄마조차도 옷 한 벌 제대로 완성하지는 못 했으니.



한편, 옆에서 거들던 남편은...


군대에서 바느질을 익혔다고 자랑하면서도 인형옷 만들기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아마 실용성이 떨어져서 그런 듯했다. 대신,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옷 수선과 헐거워진 단추 꿰매기를 하더니, 내 옷까지 수선해 주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았는지 이렇게 인형 머리를 매만지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Kris Atomic on Unsplash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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