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계획을 짤 때마다 우리 가족끼리 주고받던 은어다.
지붕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내와 실외로 구분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영국의 유명 관광지 중에서도 특히 경치가 좋다 싶은 곳만 가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내셔널트러스트나 잉글리시 헤리지티 건축물을 두고 우리끼리 하는 말이다.
* 관련 업체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며 광고비나 수익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제 개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쓴 글입니다.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호한다는 목적에서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해당 목적에 맞게 설립된 비영리, 비정부기구의 이름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에도 내셔널트러스트가 출범하였는데,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그대로 이어받아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정치적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점은 영국과 동일하다.
두 기관이 대외적으로 벌이는 사업의 성격은 유사하겠지만,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는 공원과 유적지를 회원에게는 무료로, 비회원에게는 입장료를 받고 개방하는 사업으로 영국인에게 더 알려져 있다. 영국의 유명 관광지마다 명소를 보유하고 있기에, 내셔널트러스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여행하다가 한 번쯤 이들이 운영하는 유적지에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때 개인이 소유했던 대저택이나 별장, 공원을 당사자 혹은 그 후손들이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하거나, 더 이상 관리할 여력이 없어 개발업체에 넘길 위기에 처한 자원을 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하여 관리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수백 년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건축물과 자연환경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지 않고 계속 보존된 셈이다.
침실에서 창문을 열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수가 보인다. 수십여 명의 하인이 바쁘게 오가며 주인 가족의 시중을 들고 저택 안팎을 쓸고 닦느라 쉴 틈이 없다. 집 뒤편에 있는 정원에서도 일손이 바쁘게 오간다. 모종을 옮겨 심을 자리를 삽으로 파는 이도 있고 화단에서 잡초를 뽑는 이, 또 다른 편에서는 가지치기를 하고 수레에 흙을 실어 나르기도 한다. 영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내셔널트러스트가 보유한 건물이나 공원은 수백, 수십여 년 전 건축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왔기에 사극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으로 자주 활용된다.
지금껏 우리가 방문한 내셔널트러스트 유적지에서 촬영했다고 하는 영화와 드라마로는 <드라큘라>, <오만과 편견>, <다운튼 애비>, <이성과 감성>, <폴다크>, <어바웃 타임>, <해리 포터 시리즈>, <아가사 크리스티: 명탐정 포와로 시리즈> 등이 있다.
역사적 건축물 보호를 위해 영국 정부가 1983년에 설립한 자선단체이다.
회원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운영되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적지를 매입해 관리하고 이를 회원에게 무료로 개방한다는 점은 내셔널트러스트와 유사하다. 내셔널트러스트가 민간단체라면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정부가 설립한 단체라는 점, 그래서 정부 기금으로도 운영된다는 점은 다르다.
실제 두 단체가 소유한 건물과 땅, 즉 회원에게 개방되는 명소의 성격도 조금씩 다르다. 글 첫머리에서 '지붕이 있는 곳, 없는 곳'이라 우리 가족이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즈번 하우스와 도버성처럼 지금도 그 예전의 위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현대적인 박물관, 전시장으로도 손색이 없는 일부 건축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적지가 반 이상 무너지거나 흔적만 겨우 남았다. '지붕'이 붙어 있을 리 만무하다.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보유한 건축물과 유적지 중 특히 방문객에게 인기가 많고 해외에서도 유명한 오즈번 하우스와 도버성, 스톤헨지만 본다고 해도 회원권의 가치로는 충분하다. 영국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방문거리가 된다. 유적지에 마련된 안내 표지판이나 오디오 가이드를 활용해 보자.
다 무너진 성터라도 상징적 의미가 있고 영국의 역사와 전통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
왼쪽부터 오즈번 하우스, 도버성, 스톤헨지
오즈번 하우스 (Osbourne House)는 빅토리아 여왕이 가족과 함께 별장으로 지내다가 부군인 앨버트 공이 작고한 후 여생을 보낸 곳이다. 도버성 (Dover Castle)은 영국에서 가장 큰 성이자 2차 세계대전까지 요새로 활용된 곳이다. 스톤헨지 (Stonehenge)는 기원전 1700여 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거석이다. 이 세 곳 모두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보유한 유적지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그만큼 입장권도 비싸다. 물론, 회원이 되면 모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한때 여행을 열심히 다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내셔널트러스트와 잉글리시 헤리티지 회원권을 동시에 구매한 적이 있다. 유명 여행지마다 반드시 이 두 단체가 보유한 건축물이나 공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해 우리가 계획한 여행의 성격에 맞춰 두 단체 중 한 곳만 가입한다. 여행 반경도 줄어들어서다.
부활절이나 핼러윈, 크리스마스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할 무렵에는, 특별 이벤트를 실시하므로 유적지를 방문하는 재미가 더해진다.
아니다.
- 여행의 관점이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 견해라 할 수 있지만, 지붕이 있냐 없냐로 우리 가족이 두 단체의 명소를 단순히 판가름하듯 여행의 관점이 다르다.
두 단체의 설립 목적과 관리 건축물이 일부 유사한 성격을 지니긴 하지만, 대체로 대저택과 예술품, 정원, 자연환경이 내셔널트러스트가 보유한 구경거리라면, 옛 성터와 기념비, 고대 유적지는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보유한 구경거리다.
지붕이 있다는 말은 비교적 근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며 보존 또한 현재까지 잘 되어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건축물 내부에 들어서도 구경거리가 있고 부대시설도 잘 갖추고 있다.
반면, 잉글리시 헤리티지 건축물 중에는 건축 역사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기에, 지어질 당시 자태를 유지하기 힘들다. 일부 잘 보존된 유적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붕이 없기에 건축물 내부로 들어간다고 해도 별도의 전시물을 볼 수도 없고 건물의 안과 밖을 구별하기 힘든 지경이다. 건축물이 지어진 배경과 역사적 의미, 상징성을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지역적 한계가 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속한 유적지만 관리하며, 스코틀랜드 지역을 대표하는 내셔널트러스트는 따로 존재한다.
한편, 잉글리시 헤리티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잉글랜드 한 곳의 유적지만 관리한다.
- 단기 체류하는 경우 회원 가입의 필요성을 잘 따져보자
영국에는 무료 박물관과 미술관, 유적지가 많다. 내셔널트러스트와 잉글리시 헤리티지가 보유한 유적지 중에도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하는 곳도 있다. 영국에서 1년 미만 정도로 짧게 체류한다면 굳이 회원 가입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무료로 개방하는 명소를 얼마든 찾아낼 수 있다.
- 일부 가족에게는 이동이 불편하다
앞서 나온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일부 내셔널트러스트 건물과 대부분의 잉글리시 헤리티지 건물이 휠체어나 유모차 이용자에게는 불편하다. 접근 시설을 거의 개발하지 않아 휠체어나 유모차가 없더라도 어린아이가 마음껏 돌아다니기에도 힘들 수 있다. 우리 가족의 경우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을 벗어날 무렵에야 내셔널 트러스트와 잉글리시 헤리티지에 가입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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