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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영국 날씨 때문에 생겨난 여행 습관

by 정숙진

-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부활절 방학에는 도심으로 여행을 떠납시다."


한 해가 시작되고 '여행'이 우리 가족의 화두가 될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다.


영국의 학교에는 6주 간의 긴 여름 방학과 1, 2주짜리 짧은 방학까지 총 여섯 차례 방학이 있다. 중간에 공휴일이 끼어 있기도 한데, 대부분의 공휴일이 월요일 아니면 금요일에 해당한다. 이런 때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여행을 떠나지 않고는 못 베기지.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의 날씨는 맑고 화창할 때보다 비바람과 안개, 구름을 동반할 때가 더 흔하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일조량도 적은 편이다. 같은 영국이라도 지역별 편차가 있어서, 북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날씨에 대한 불만이 강해지지만, 영국 어느 지역에 정착하든 날씨에 대한 불평이 빠지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눅눅해진 땅을 따라 걷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지만, 휴가 내내 그런 광경만 보고 지내야 한다면 우울하지 않겠나.


이왕이면 맑고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을 배경 삼아 인생 사진을 찍고, 신발과 바지가 진흙투성이가 될까 걱정하지 않고 풀밭을 걷고 싶을 테다. 세월의 풍파에 조금씩 닳고 허물어지면서도 신비로운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중세 건물이나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해변을 감상하며 야외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싶다.


이 모든 소망은 날씨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날씨를 염두에 둔다. 당일치기 일정이라면 여행 며칠 전 일기예보를 참조하는 것만으로도 최적의 여행지를 골라낼 수 있지만, 숙박과 교통편을 사전에 예약하는 등 준비 기간이 긴 여행은 단기 정보에 의존할 수 없다.


몇 개월 뒤 날씨를 예측하기도 힘들고, 행여 어떤 식으로든 예측한다 해도 비바람과 안개, 구름이 언제든 등장할 것이 뻔한 영국에서 날씨를 염두에 둔다고? 그런다고 여행의 양상이 달라질까?


영국의 사계절을 반복해 겪다 보니 시시때때로 변하는 날씨라 해도 나름 규칙적인 패턴이 있음을 느꼈다. 개인적 견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6월과 9월 초 사이가 영국에서는 최고의 계절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오기 전 아직도 봄꽃의 늦잔치를 즐기기에 충분하면서도 봄가을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자취를 감추어서다. 서안해양성 기후 덕택에 한여름이라도 대체로 30도를 넘지 않고 장마도 없으니 이 또한 내가 영국의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을 30년 가까이 버텨낸 자의 여유일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태어나 줄곧 성장한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얼음을 깨서 샤워하고 찜통 무더위에 완전군장으로 행군도 했다'며 군대 무용담을 늘어놓는 남편마저 영국에서 맞이하는 여름에는 맥을 못 춘다. 이렇듯 나의 여름 예찬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조차, 여름만큼 영국에서 돌아다니기 좋은 계절은 없다는 내 주장에는 동의해 준다.


영국에서 날씨 걱정 없이 여행 떠나기 좋은 계절이 여름이라면, 나머지 계절은 어떨까?


영국의 봄과 가을은 날씨면에서 가장 변화무쌍하다. 4월에 폭설이 내린 해가 있는가 하면, 때 이른 무더위로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폭증한 해도 있다. 봄가을 일기예보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단어는 비, 바람, 폭풍우, 구름, 안개, 소나기, 강풍, 꽃가루다. 각 단어가 별개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럿이 번갈아가며 등장하니 말 그대로 변화무쌍이다. 이들 중 내가 가장 꺼리는 단어는 강풍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여행은 다닐 수 있지만, 강풍이 불면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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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풍이 불어 우리 집 정원 담장이 무너졌을 때다.


강풍 주의보가 연이어 내려진 탓에, 언제 또 바람이 불어닥칠지 몰라서 이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동네 고양이들의 놀이터가 돼버렸다. 같은 집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강풍으로 담장이 무너진 건 세 차례다. 무너진 건 아니지만 '무너지지 아닐까' 염려할 정도로 풍속이 강했던 시기도 더러 있다.


이런 날씨 걱정 때문에 내가 선택한 여행 방법은, 아니, 여행지 선택 방법은 봄가을에는 대도시로, 여름에는 전원 지역으로 가자, 이다.


내 논리는 간단하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계절에는 산이나 바다, 들이 펼쳐지는 전원보다는, 언제든 실내로 들어갈 수 있는 대도시가 여행지로 적합하다, 이다. 여기서 실내라고 하면 카페나 펍도 가능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해당한다. 이왕이면 악천후를 피하는 동안 볼거리, 할 거리가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제격이다. 이런 요건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 바로 대도시다.


영국의 전원이라고 하면 순수 전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하늘과 땅, 바다, 벌판, 나무, 꽃이 전부요, 그 외 인공적인 요소는 최소화시킨 공간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절경에 감탄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넓은 땅덩이 어디에도 커피 한 잔 마시며 편하게 쉴 공간을 찾기 힘들다. 그런 장소에서 악천후를 만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여행 당일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문명의 손길을 최소화시켰으니 포장도로가 거의 없다. 자연의 흙길 그대로이거나 자갈만 살짝 덮어놓은 정도라, 한 번 빗물이 스며들면 며칠간 진흙길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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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전원 지역이라고 하면, 편의시설이 거의 전무한 이런 길이 끝없이 펼쳐지곤 한다. 이 길마저도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일행 모두 가시덤불 위로 위태롭게 올라서며 양보해야 했다.



"죄송하지만, 공원 내부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


공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의 말이다.


방금 들어선 정문에는 화장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이곳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곳일수록 화장실 대용이 가능한 공간도 나온다.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적어도 우리 집 두 남자의 볼일은 해결되는 곳 말이다. 급할 때는 이런 식으로 이용하라고 공원 측에서 조언해 줄 정도다.


편의시설이 부족한 곳에서 악천후를 만나니 여행이 고난의 행군으로 다가왔다. 앞서도 말했듯 날씨가 안 좋다고 여행의 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악천후를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자, 악천후를 피할 장소를 미리 확보하자, 가 내 여행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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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내내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야외로 돌아다니는 대신 박물관과 전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 여행이다.




지금껏 영국의 봄과 여름, 가을에 떠나는 여행만 논하고 겨울은 쏙 빼놓은 상태다.


영국의 방학은 사계절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서 가족끼리 일정만 잘 맞춘다면 계절마다 원하는 주제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특히, 자녀를 둔 직장인은 아이의 방학과 자신의 취향에 맞춰 휴가를 낸다.


개인적으로 겨울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겨울 스포츠도 즐기지 않는다. 겨울 여행을 미리 준비할 만큼 겨울에 대한 애착이 강할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여행을 전혀 떠나지 않는 편도 아니다. 가족과 함께 근교 도시를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며 시내를 돌아다니는 정도다. 가족의 관심사를 즉흥적으로 반영하면서 이 때도 역시 날씨를 참조하여 여행지나 놀이터를 결정하는 식이다.


친구들이 SNS에 올리는 사진을 보면 유럽인도 개인 성향과 자녀의 방학에 맞춰 여행을 다님을 알 수 있다. 암벽 등반을 하는 한 친구는 휴가 때마다 가족과 함께 등반을 떠난다. 스키 마니아 친구는 스키장이 문을 닫는 4월 중순까지 스키를 즐긴다. 한겨울에라도 텐트와 침낭, 간단한 취사도구만 챙겨 도보로 캠핑을 떠나는 친구도 있다. 모두 내 또래의 워킹맘이다.


이들이 올린 사진에 공통점이 있다면 계절에 상관없이 날씨가 화창하다는 점이다. 수백여 장의 사진 중 최고의 순간을 담은 모습만 보여주려는 SNS 특성상 매번 날씨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어쨌건, 나 말고도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가 있다고 하니 위안이 된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njana Men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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