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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재무장관은 왜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일까?

by 정숙진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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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글을 새롭게 다듬어 올립니다 -


"장관님 안녕하세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남성을 향해 누군가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이 남성이 건물 앞 중앙에 서서 카메라를 응시할 무렵 그가 걸어 나온 문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 Sky News



남녀 6명으로 구성된 이들 무리가, 남성을 중심으로 양편에 자리 잡고 섰다. 좌우를 훑어보며 모두가 자리했는지 확인한 뒤, 이 남성은 들고 있던 빨간 가방을 자신의 어깨 높이로 추켜올렸다. 그 상태에서 몸을 좌우로 돌려 보이기도 했다. 


잠시 뒤, 그의 양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고 다시 남성 혼자만 자리에 남게 되자, 한 번 더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해 좌우로 몸을 돌렸다. 


그의 오른편, 즉 TV 화면상으로는 왼편에서 간간히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그쪽으로도 몸을 향하더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화면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출입이 통제된 철제문 너머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을 향한 인사였으리라. 


2년 전 이맘때,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인 제러미 헌트가 관저를 나서는 모습이었다. 


Chancellor of the Exchequer

* (영국의) 재무장관


간단히, Chancellor라 부르기도 한다.


그가 걸어 나온 대문의 번호가 알려주듯, 이 건물은 다우닝 스트리트 11번지로, 바로 옆 10번지에 총리 관저가 위치한다.


제러미 헌트가 의회에서의 예산안 발표를 위해 관저를 나서는 길인데, 그가 들고 있는 가방에는 이날 발표할 자료가 담겨 있었다. 연설문 종이 몇 장을 넣고 다니기에는 가방의 의미로 너무나 미미하지만, 예산안 발표를 알리는 상징이 된 가방이다. 


그가 참모들과 함께 관저 입구에서 단체로 기념 사진을 찍고 가방을 들어 보이는 행위까지 이미 그의 수많은 전임자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전통이다.


바로 이틀 전인 3월 26일, 영국 정부의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이 글을 다시 쓰려 마음먹었던 나는 새 재무장관의 영상을 제일 먼저 이 자리에 활용할 계획이었다. 예산안 내용에 초점을 두기 위해서가 아닌, 예전 글과 마찬가지로 이 빨간 가방에 담긴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웬일인지 현 재무장관인 레이철 리브스가 이 빨간 가방 대신 서류철만 들고 나타났다. 다행히 같은 빨간색이긴 하지만. 


손에 든 물건만 바뀐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단체로 또 단독으로 포즈를 취하고 손에 든 가방 (아니 서류철)을 들어 보이는 행위마저 생략했다.



@ Guardian News



원하는 영상을 얻지 못해 아쉽지만, 그렇다고 영국의 재무장관이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이는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아닐 테니, 내가 쓰려했던 그대로 이어가도록 하겠다.



빨간 가방?


영국에서, 말 그대로 빨간 가방 (Red box) 혹은 예산 가방 (Budget box)이라 부르는 이 가방의 역사는 18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재무장관이던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새 예산안 발표를 알리는 전통이 되었다.  


 

"앗, 저 가방은?"


2006년 이맘 때다.


TV 화면을 들여다보던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 곁에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으련만, 돌도 안 된 아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theguardian.com



당시 재무장관이던 고든 브라운이 새 예산안 발표를 위해, 앞서 나온 제러미 헌트처럼, 빨간 가방을 들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그가 총리가 되면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인물이 채우고, 이후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또 나중에는 내각 개편으로 새 인물이 임명되거나 논란에 의해 실각되는 등 재무장관은 수차례 교체되었다. 


수시로 새로운 인물이 장관직을 맡아 왔지만 가방을 들어 보이는 전통은 변함없이 반복되어 왔다. 심지어, 그저 서류철만 들고 나타나 나를 실망시켰던 레이철 리브스도 작년 11월 예산안 발표에서는 전임자의 전통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토록 많은 가방 장면 중에서도, 나는 고든 브라운이 주인공으로 나선 위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별히 색다른 외모나 눈에 띄는 행동 때문은 아니다. 


영국의 재무장관이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카메라에 나서는 모습을 내가 최초로 지켜보았기에 그렇다.


한 나라의 장관이 경매사처럼 가방을 들어 보이고, 몸을 돌려가며 카메라에 응하는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하필, 다른 때 다른 상황에서 보았던 장면과 겹치면서 장관의 가방 든 장면이 그토록 잊히지 않게 되어버렸다.





바로...






twitter.com



이 친구 때문이다.


어린 아들을 위해 틀어놓곤 하던 TV 텔레토비 시리즈를 아들보다 내가 더 즐긴 탓이라고 해야 할까. 고든 브라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가방을 치켜드는 순간, 빨간 핸드백을 걸친 보라돌이가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올랐고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다. 


정치인은 물론 왕족까지 신랄한 비판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 영국에서, 누군가 나처럼 재무장관의 빨간 가방과 보라돌이 캐릭터를 연관 지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지금껏 내 힘으로는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재무장관에 대한 비판을 삼가기 위해서가 아닌, 텔레토비 캐릭터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 자세가 아닐까 싶다. 


내 글을 읽고 기분이 상한 텔레토비 팬이 있다면 양해해 주기 바란다.


커버 이미지: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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