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가 끝나고 다들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도중 A가 털어놓았다.
이날 모인 자리에서의 대화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서머타임이었다. 대부분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라 서머타임 실시 여부를 모르고 있던 중 갑자기 한 시간이나 흘러버려 당황했다고 한다.
시간이 달라졌음을 알게 된 시점도 제각각 다르다.
A처럼 모임 시간이 다 되도록 모르는 이도 있었고, 이른 새벽부터 라디오 방송을 켜놓은 덕택에 '이 시각 주요 뉴스를 알려드립니다'라며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는 이도 있었다.
서머타임 실시 여부를 미리 알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는 점 말고도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자녀가 한국에서의 봄방학을 끝내고 새 학년을 시작할 무렵인 3월 초에 영국에 왔다는 점인데, 서머타임이 시작되는 시기와 그리 멀지 않다.
반면, 영국에서 새 학년을 시작할 시기인 가을에 온 사람이라면, 영국의 서머타임이 해제되는 시기 즈음 혼란을 겪는다.
분명 예배 시간에 맞춰 왔음에도 교회 문은 잠겨 있고 주변에 아무도 없길래 이상하다 싶어 계속 두리번거리다 나중에야 시간이 바뀐 걸 알아차렸다는 B의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도 서머타임이 실시되던 때 TV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서머타임을 예보하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내일 한 시간 늦어지니 시계 잘 맞춰야 합니다'라고 외침던 일이 기억난다.
잠들기 전 아빠가 한 번, 나중에 엄마가, 또 오빠까지 시계를 돌려놓는 바람에 한 시간만 돌려야 할걸 두 시간으로 혹은 세 시간까지 돌리게 되어 이른 새벽부터 온 가족이 잠을 설쳤다는 대혼란의 사례가 심심찮게 전해졌다. 서머타임 자체를 깜빡하고 평소처럼 출근했다가 지각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다행이라고 하면, 영국은 서머타임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시작해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끝낸다는 점이다. 올해는 3월 30일.
그린란드처럼 서머타임을 토요일에 시작해 일요일에 끝내는 국가도 있지만, 대부분 영국과 마찬가지로 일요일에 시작해 일요일에 끝내므로, 시간 변경으로 인한 혼란은 적은 편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서머타임을 실시하는 곳이 70여 개 국가 (34%)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처럼 과거에 서머타임을 실시한 적 있는 국가까지 합치면 140여 개 국가에 해당한다. 아마도, 내 어린 시절 기억처럼, 한 때 서머타임을 실시했다가 이점보다는 혼란과 폐단이 더 많아 폐지했으리라.
해가 길어지는 하절기에 하루 일과를 한 시간 더 일찍 시작하여 남는 오후 시간을 활용하고 전등을 켜는 시간을 줄이는, 말 그대로 일광 절약 시간이 서머타임이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이미 서머타임과 함께 보낸 나로서는 서머타임에 찬성하는 쪽이다.
이런 식으로 애매모호한 의견을 내놓는 이유는,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산다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서머타임을 바라볼 가능성이 커서다.
연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를 기준으로, 영국의 일출 시간은 4시 35분이요, 일몰이 21시 44분이다. 반면, 한국은 일출이 5시 10분, 일몰은 19시 56분이다. *
동지에 이르면 풍경이 사뭇 달라진다.
영국의 일출이 8시 25분, 일몰이 15시 47분이 된다. 일출이 7시 43분, 일몰이 17시 17분인 한국에 비해 낮 시간이 급격히 줄어든다. *
* 참조 웹사이트: timeanddate.com, astro.kasi.re.kr
"새벽 4시 35분에 해가 뜬다고?"
엄밀히 따지면, 서머타임이 적용된 시간이니, 실제는 새벽 3시 35분이라 할 수 있다.
백야 현상을 겪는 북유럽 국가처럼, 영국에서도 침실에 암막 커튼을 설치하는 걸 강력히 권고한다. 이른 새벽부터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태양빛을 피하고 싶다면 말이다.
"정말, 밤 9시가 넘어도 해가 안 질까?"
얼핏 보면 둘 다 비슷한 계절, 비슷한 시간대로 보이지만 왼쪽은 6월 11일, 20시 52분에 촬영했고, 오른쪽은 12월 26일, 15시 55분에 촬영했다. 같은 일몰 무렵이지만 둘 사이 간극이 5시간이나 되는 셈이다.
계절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이 이토록 다르니 일상에도 영향을 준다.
왼쪽 풍경은, 밤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신나게 거리를 활보하고 분수대에서 노는 모습이다. 이미 영국의 어린이라면 취침에 들어가야 할 시간인데 말이다.
오른쪽 사진은, 이제 막 오후 4시를 넘겼는데 벌써 해가 지고 어둑해지고 있다. 서둘러 귀가해야 할 분위기다.
저녁식사를 마치는 6시 반 전후 우리 가족이 동네를 산책하던 때다. 같은 길목에서 같은 시간대에 걷고 있지만 주변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불편하다.
우선, 시차에 대해 이중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어... 지금 한국 시간이...?"
내가 해외에 나와 살고 있으니, 고국에 있는 친지와 지인에게 연락할 때마다 시차를 고려하는 건 당연하다. '오늘 오후 3시경 판결이 나옵니다'처럼 고국에서 벌어지는 주요 행사나 사건, 사고 등의 정보를 접할 때도 시차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영국 시간에서 9시간을 더하던 것이 이제 8시간이 되니 이에 적응하는 수고가 추가된다.
서머타임 실시로 겪는 불편함이 겨우 시차를 이중으로 신경 쓰는 거라고?
솔직히, 그 외 불편한 점은 없다고 봐야 한다.
기상과 식사, 취침까지 시간의 영향을 받는 행위에 적응하는 문제가 있긴 한데, 영국에서 수 차례 서머타임을 겪다 보니 이를 어려움으로 보지 않아서다.
일요일 오전에 서머타임이 시작되고 또 해제된다는 점에서 적응이 쉬웠던 것 같다.
토요일마다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친구를 만나는 등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하게 하루 일과를 보낸 뒤 늦잠을 자고 나면 다음 날 일요일 이미 기상 순간부터 저절로 적응하는 식이다.
식사 시간의 경우 당분간 바뀐 시계에 맞춰 먹느냐 아니면 이전 시계에 맞춰 먹느냐 가족과 협의하는데, 가족들도 이미 적응했는지 바뀐 시계를 곧바로 따르자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영국에 살면서 서머타임 실시로 인해 달라진 시계에 맞춰 사는 일보다는, 앞서 나온 사진처럼 저녁도 먹기 전에 해가 저무는 시기를 연중 반이나 겪어야 한다는 점이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서머타임이 시작될 때마다 속으로 주문을 외운다.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해가 짧아지는 시기를 맞이할 때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alvestida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