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갑갑해도 무시하면 안 되는 영국의 편지 문화

by 정숙진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이런 문구로 시작하는 편지나 쪽지를 누구나 한 번쯤 받았거나 혹은 다른 이에게 보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면 적어도 그런 편지가 한때 유행했음을 들었으리라.


나는 이 '행운의 편지' 내용과 그 원천에 대해 밝히는 일보다는, 이 문구에 등장하는 영국이라는 단어에 더 관심이 간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런 유행에 '영국'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걸 보면 영국의 편지 문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은 편지를 사랑하는 나라다. 친구와 가족뿐만 아니라 은행과 학교, 병원, 관공서까지 편지를 보내온다.


내가 처음 영국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지금처럼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 전달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이런 때 내 이름이 들어간 종이 편지를 받고 보니, 이 낯선 나라가 드디어 내 존재를 인정해주는구나 싶어 감격까지 했다. 하지만, 그 횟수와 분량이 점차 감당하기 힘들어지다 못해 영화 '해리 포터'의 장면이 연상될 정도가 되었다.



harry.png x.com



주인공 해리 포터가 아닌 그 뒤에 앉은 이모의 반응이 당시 내 모습에 가깝다.


정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던 나는 문서를 철저하게 관리해야만 하는 업무 습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영국에 왔다. 덕택에 내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편지를 나 스스로 이유도 모른 채 날짜별로 정리해 바인더에 보관했다. 예전 직장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강박적인 행동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영국 문화 적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이 편지가 상당수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편지는 계속 온다. 영국인이 보내는 편지는 단순한 안부 문의나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 그치지 않아서다.



"자궁경부암 검진 시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치과와 민간병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원 진료가 무료다. 이 때문인지 정기 검진 시기가 아니면 전문의 검진을 받기 힘든 경우가 있다. 반대로, 귀찮다는 이유로 정기 검진을 무시하면 끈질길 정도로 연락해 검진을 받으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이런 때 병원에서 연락하는 방식이 편지다.


문자와 이메일로 간편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시대에 종이 편지라니,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하지만,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편지 자체는 무시하면 안 된다. 특히나 영국에 사는 외국인이라면 말이다.


Ophthalmology... Gastroenterology... Lymphoedema... 누구나 평생에 한 번은 관심 가질 만한 병동과 질병 이름이다. 한국어로는 간단하지만 영어로는 이토록 길고 복잡한 단어가 쓰인다. 자신이 찾아가야 할 병동이나 검진받을 질병이 이런 식이라면 잊어버리기 십상이니 병원에서 받은 편지를 참조해야 한다.


미로 같은 영국의 대형 병원에서 길을 잃지 않고 원하는 검사실까지 무사히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편지를 지참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 속에 담긴 검사 전 유의사항도 챙기고 말이다.



Third-party-provider-appointment-letter.png england.nhs.uk



위 이미지는 피부과 검진을 앞둔 환자에게 보내는 편지 샘플로 검진 날짜와 시간, 재예약 방법, 장소, 연락처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1차 의료기관에 해당하는 주치의와의 만남은 환자가 직접 예약하지만, 전문의와의 만남은 주치의가 예약하므로, 위와 같이 예약되었음을 알리는 편지가 환자에게 발송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번 달 입출금 내역서입니다."


영국에서 은행 계좌를 만들면 통장 대신 입출금 내역서 (Bank statements)를 정기적으로 보내준다. 이 또한 온라인 서류로 대체 가능하지만,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이라면 당분간 우편으로 발송되는 종이 내역서를 모아둘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한 문서는 정식 서류로 인정하지 않는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받은 문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아래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



"다음 달부터 하수관 공사가 시작됩니다."


가스, 전기, 수도 등의 공공서비스 업체의 편지는 영국에서 가장 흔하게 받을 수 있는 형태다.


시설 공사를 하는 사람이라 속이고 가정집에 들러 귀중품을 털어가는 범죄가 영국에서 간혹 발생한다. 집주인이라 하더라도 사전에 허락 없이 세입자의 집에 들어서지 못하는 판에 낯선 사람이 무턱대고 집을 방문하여 공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업체에서 통보가 오는지 평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통보를 받은 적 없다면, 아무리 믿을만한 업체의 명찰을 제시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


범죄와는 무관하지만, 공사로 인해 생활에 불편을 겪을 수 있으므로 편지에 담긴 공사 일정을 미리 확인해 두어야 한다.


이외 공공서비스 업체, 관공서가 보내오는 편지


- 요금 고지서

- 새로 이사 온 가정을 대상으로 납부자 정보를 확인하는 편지

- 상하수도, 광케이블 등 시설 공사가 있음을 알리는 편지

- 유권자 등록 여부를 조사하는 설문지

- 지방선거, 총선거 등을 앞두고 보내는 투표 안내문

- 지방세, 자동차세 고지서




영국의 편지 문화를 처음 접하면 느리고 갑갑해서 속이 터진다. 전화나 이메일 한 통이면 몇 분 만에 처리 가능한 일을 종이 우편에 의존하느라 일주일씩 기다리니 말이다. 여기에 쓰이는 종이와 우표도 아깝다.


영국인은 왜 이토록 불편하게 소통하는 걸까?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집으로 배달되는 편지를 모아둘 필요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1. 편지가 각종 증명서 역할을 한다.


출생증명서 외에는 영국에서 가족 관계나 주소를 증명할 증서도 없고 이를 발행해 주는 기관도 없다. 한국처럼 주민등록번호만으로 실시하는 신원 조회도 없다. 여권이나 운전면허증으로 신분을 밝힐 수는 있지만, 영국의 신원 조회는 엄밀히 말해 '신원 증명'과 '주소 증명', 이 두 가지를 개별적으로 거쳐야 한다.



2. 신원 증명서에 이어 주소 증명서까지 갖추려면 편지가 필요하다.


- 신원 증명서 (Proof of identity)


말 그대로 신분증이다.


한국의 주민등록증처럼 만인 공통의 신분증이 없는 영국에서는 출생증명서, 운전면허증, 여권 등을 신분증으로 사용한다.


- 주소 증명서 (Proof of address)


간단히 말해 이름과 주소가 들어간 편지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이름으로 배달된 편지가 모두 주소 증명서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


앞서 예로 든 은행과 관공서, 공공서비스 업체와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이 보낸 편지만 가능하다. 또한, 대부분 최근 3개월 이내에 받은 편지라는 조건이 붙는다.


운전면허증에 주소가 나오므로 신원 증명과 주소 증명을 동시에 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운전면허증 하나만으로 증명서 두 가지를 갖췄다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



3. 이름과 주소가 들어간 편지는 누구나 필요하다.


배우자의 영어가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정에 필요한 문서를 부부 중 한 사람이 도맡아 관리하는 경우가 있다. 영국에 살면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면서 부부 중 한 명의 이름만 넣는 방식으로 말이다. 은행과 관공서, 공공서비스 이용은 물론 휴대폰 개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렇게 되면, 배우자가 영어로 소통할 일이 없어 당장은 부담이 덜어지겠지만 결국 주소를 증명할 길이 없어진다.


비자나 영주권, 시민권 신청, 부동산 계약, 학교 등록까지 모두 신원 증명서에 이어 주소 증명서까지 요구된다.


영국에 사는 외국인이니 당연히 여권은 있을 테고 이를 신원 증명서로 활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껏 배우자가 문서를 관리했다면 자신의 주소 증명은 무엇으로 하겠나?


영어 능력이나 경제 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를 만들고, 지방세나 가스/전기/수도 등 가정에서 흔하게 발급되는 고지서에 이름을 넣어두자. 주소 증명서가 확보된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Debby Huds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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