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등교 준비를 하던 아들이 평소와 다르게 결의에 찬 목소리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를 크고 길게 강조하면서.
내가 꼭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소린가 보다. 한국어가 어눌한 아들에게 '아동학대'니 '예방'이니 하는 단어는 어려운 개념이다. 학교에서 들은 영어 단어를 그대로 섞어서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도 황당해서 이렇게 대꾸는 했다만 아들의 의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아동학대 예방 교육이 실시되는 기간이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학대 상황이 무엇인지 인지시키고 아이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다. 위급 상황에 대비한 연락처도 알려준다.
아동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어른이 때로는 악마로 돌변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수시로 보고되는 피해 사례를 고려한다면 현실적인 대응 방안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교육, 특히 이번처럼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는 프로그램은, 학부모에게 미리 통보하기 때문에 나도 이번 교육을 알고 있었다. 그런 절차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을 시시콜콜 들려주는 아들이 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내 귀에 들어온다. 그러니, 꽤 다양한 방식으로 며칠간 진행되던 이 교육을 내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그런데, 등교할 무렵만 해도 '엄마도 조심해야 할 수 있어요'의 자세로 당당하게 경고하던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서글픈 눈을 하고는 내 품에 안겼다. 이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리다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나 보다.
아들이 학교에서 시청했다는 애니메이션 내용이다.
한 아이가 아침에 잠이 깨어 침대에서 일어난다. 부모는 자고 있다.
학교 갈 시간이 다가오면서 아이는 배가 고파진다. 집 어딘가에 먹을 것이 있나 찾으러 나선다. 집 곳곳에 부서진 유리 조각과 쓰레기가 나뒹군다.
아이는 배고픔을 참고 쓸쓸히 집을 나선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부모는 자고 있다.
이런 영상의 작품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또 효용성은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모른다. 설령, 본다 하더라도 내 능력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지 싶다. 내가 경험한 영국의 공익 광고는 어린아이가 시청하기에 적합한가 싶을 정도로 섬뜩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을 때가 있어서다.
아들이 보았다는 장면도 아마 그런 부류의 영상이라 짐작된다. 이런 작품이 주는 특유의 우울감도 있겠지만 학대받는 아이의 실상을 지켜보면서 아들은 연민을 느꼈으리라. 한편, 이런 아이에 비해 자신의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깨닫기도 한 셈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엄마를 경고하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의 행복 눈높이를 현실적으로 낮추어준 학교 프로그램에 내심 감사하게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의 직업 때문에 해외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자녀를 키운 지인의 말이 기억났다.
낯선 국가로 옮겨 온 뒤 가족들이 이제 적응하고 사는구나 싶으면 다시 이삿짐을 싸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우리 또 이사 가야 한다'라고 딸에게 말했더니 '이러면 아동학대 아닌가요?'라고 따지고 나섰다. 이제 겨우 친구를 새로 사귀고 학교도 적응해 가는데, 이 모든 것들과 다시 이별해야 한다니 아이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진지하게 또 당돌하게 나오는 아이에게 '그럼 신고해 보지?'라고 웃으며 응수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학대라는 의미는 너무도 광범위한 것 같다. 그러니 정작 무엇을 경계하고 행동으로 나서야 하는지 모르기도 한다.
영국의 한 자선단체가 제작한 아동 성추행 예방 포스터다.
이름하여 '언더웨어 규칙'.
Pants
* 팬티 (영국 영어)
팬티를 뜻하는 단어 Pants의 각 알파벳을 머릿글자로 한다. 아이들에게 친숙한 단어이자 물품이며 소중한 신체 부위를 보호하는 Pants를 내세워 학대의 의미를 설명한다.
영국의 아동학대 방지 교육에는 신고 전화번호를 외우게 하는 과정도 나온다.
아들의 말로는, 교육 담당자가 손가락으로 동작을 만들고 춤을 추는 방식으로 전화번호를 외우게 했다고 한다. 이 번호 외우기 교육을 받은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아들은 당시 배운 춤과 노래를 어렴풋이 기억해내곤 했다. 번호가 외우기 쉬운 면도 있지만, 어린 시절 TV 화면을 통해 혹은 학교에서 교사를 통해 배우던 노래와 동작을 오랜 세월이 지나고도 기억할 때가 있지 않은가.
전화번호에 반복되는 숫자인 0과 1과 8을, 손가락 동작으로 흉내내고 노래를 부르며 번호를 외우는 식이다. 평소에 기억해 뒀다가 급할 때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어찌 보면 부모 입장에서는 가슴 철렁한 일일 수도 있다. 말도 못 하는 어린아이가 위급 상황도 아닌데 경찰이나 소방서에 연락하여 곤란을 겪을 때처럼 말이다. 영국의 긴급 신고 전화는 999다. 얼마나 누르기 쉬운 번호인가.
철이 들만하다 싶으면, 이제 좀 더 어려운 번호를 눌러서 부모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
999만큼 쉬운 번호는 아니지만, 노래와 춤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아동학대 신고 전화번호도 부모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어른과 말다툼을 벌이다 홧김에 누를 수도 있지 않은가. 내 아들은, 엄마가 숙제 검사를 꼼꼼히 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집 딸은,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이유로 아동학대로 몰아가지 않았나.
나도 지인도 당할 뻔한 일이지만 다행히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어찌 조용히 넘어가기만 하겠는가.
TV에 출연한 남성의 사연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학교도 자주 빠지며 나쁜 행동을 일삼길래 야단을 쳤다. 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는 딸을 나무라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뺨을 내려쳤다.
충격을 받은 아이는 그대로 집을 뛰쳐나갔고 몇 시간 뒤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세월이 조금 흐른 뒤 두 부녀는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니는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딸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긴 했지만, 그리고 뺨을 때린 것도 폭력이긴 하지만 이를 아동학대로 몰아서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는 없었나 보다. 아빠가 폭력을 휘두른 전력이 없으니.
예전 일을 웃으며 회상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며 나도 흐뭇해졌다.
하지만, 아찔하긴 했다.
신고 정신이 강한 영국이다.
부모를 신고하도록 교육시키는 '빅브라더'가 나오는 소설 <1984년>이 탄생한 나라다.
아들...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고!
커버 이미지: Photo by Vitaly Gariev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