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각까지 지하철 승강장은 물론 달리는 열차까지 취객들로 붐비고 있다. 화려한 파티복이나 우스꽝스러운 장신구 차림에다 맥주 캔이나 와인 병, 샴페인 잔을 든 이가 눈에 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승객까지 어우러져 즉석에서 파티를 벌이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당시 런던 시장인 보리스 존슨을 연상시키는 가발을 쓴 사람, 1920년대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의 미국 분위기를 재연한 옷차림까지 나타났다.
좁은 승강장과 선로 사이, 보호 장치가 없는 곳에는 미어터질 듯한 군중들로 휘청거리는 움직임이 불안해 보일 정도다.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시비가 벌어져 서로 언성을 높이거나 몸싸움을 벌이는 이도 있다. 의자나 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사람,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쓰러지는 사람, 이들에게 부딪히거나 깔려 다친 사람도 나왔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일부 역은 폐쇄되기까지 했다.
바로 다음 날인 2008년 6월 1일은 런던에서 '대중교통 음주 금지법'이 시행되는 날이었다. 런던 시장으로 갓 취임한 보리스 존슨이 선거 공약으로 이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런던 지하철에서 음주가 허용되는 마지막 날을 유쾌하게 즐기고자 소셜 미디어의 힘까지 빌린 런더너들이 어우러져 광란의 밤을 펼친 것이다.
이날 이후 런던의 지하철과 버스, 전차 등의 모든 대중교통에서 음주가 금지되었다. 안 마시더라도 뚜껑을 딴 술병이나 캔을 들고 승차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다. 다만, 런던에서 타 도시를 오가는 기차에는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취객들이 지하철역에서 떼어낸 포스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위 포스터 문구의 내용
From 1 June 2008 drinking alcohol is prohibited on public transport.
2008년 6월 1일부터, (런던의) 대중교통 이용 시 음주가 금지됩니다.
이 모두가, 영국에서 술 마시는 풍경 중 내가 가장 흥미진진하게 봤던 장면이다.
이외에도 영국의 술 문화를 언급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사실을 아래에 Q&A 형식으로 정리해 봤다.
15세가 아니라 5세다.
파티에서 어른들이 마시다 남긴 와인을 호기심에 홀짝이는 유치원생과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지'라며 코흘리개 조카에게 맥주를 따라주는 삼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공공장소가 아닌 가정과 같은 사적인 공간에 한해서다.
미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2000년대부터 미국식 프롬 (Prom) 파티가 영국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 시작한 파티 문화지만 술에 관대한 영국인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프롬 파티에 참석했던 자녀와 이들의 친구까지 집으로 초대해 뒤풀이를 열어주는 학부모가 있다. 기나긴 졸업시험을 끝내고 학교도 마쳤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미성년자를 불러다 놓고 밤늦도록 술을 마시게 내버려 둔다.
몇 해 전, 아들이 프롬 파티를 끝내고 친구들과 뒤풀이를 하던 풍경이다.
술을 못하는 아들은 혼자서만 맨 정신으로 앉아 있고 주변에 술에 취해 휘청거리거나 아예 쓰러진 친구도 있다. 모두 중등학교 졸업시험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만 16세 전후의 학생들이다.
영국식 프롬 문화와 음주 분위기를 모르는 부모라면 이날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내 아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 2시까지 놀다 귀가했지만 술에 취한 채 그대로 남의 집에서 잠들었다가 다음 날에나 귀가한 친구도 있다고 한다.
16세부터 -> 성인과 동석한 자리에서 반주로 마실 때만 가능하다. 즉, 혼술과 강술은 안 된다.
18세부터 -> 투표도 하고 부모 허락 없이 결혼도 가능한 성인이므로, 술 구매와 공공장소에서의 음주까지 모두 가능하다. 혼술, 강술 다 포함된다.
우리가 아는 사이다가 아니다.
영국에서 사이다 (Cider)라고 하면 사과로 만든 술, 즉 사과주를 가리킨다.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아니지만, 전 세계 소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이 마신다. 전통 사과주 외에 배와 체리, 딸기 등의 과일로도 만든다.
영국의 마트 주류 코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이다는, 진열된 수량과 다양성으로 따지면 맥주와 유사하다.
아들아,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사이다를 마셔보겠니?
술집뿐만 아니라 식당, 호텔, 나이트클럽, 슈퍼마켓, 편의점, 구멍가게, 주류전문점 등 술을 취급하는 곳은 모두 한다.
영국에서는 신분증 검사가 비교적 철저한 편이다.
무엇보다, 서양인의 눈으로 동양인의 나이 구별이 쉽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생김새에, 서양인에 비해 몸집이 작거나 이목구비가 덜 또렷해서 일수도 있다. 구별이 힘들면 무조건 'ID please (신분증 보여주세요)'라고 외친다.
누구든 신분증 스캔을 받아야 입장이 가능한 나이트클럽도 있고, 80대 노인에게까지 'No ID, No Sale (신분증 없으면 술 안 팔아요)' 외치는 바람에 고객들로부터 불만을 사는 술집도 있다.
경찰 단속
영국에서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하다 적발된 영업장은 고액의 벌금이나 영업 정지, 영업장 폐쇄 조치를 당한다. 미성년자를 술 구매 고객으로 위장시켜, 법률을 위반하는 업주를 적발하는 함정 수사를 경찰이 펼치기도 한다.
고객을 대상으로 엄격하게 신분증 검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Challenge 25
25세 미만으로 보이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신분증 검사를 실시하는 정책이다. 술을 취급하는 업소에서 주로 볼 수 있다.
25세 미만이라면, 이미 대학생이거나 직장인, 부모가 될 수도 있는 나이인데, 이런 사람을 대상으로 신분증 검사를 한다고?
술 구매가 허용되는 18세 이상이라는 나이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전후의 학교 선후배나 조카 얼굴을 떠올려보라.
직장인이나 대학생다운 어른스러움을 뽐내는 이도 있지만, 아직 젖살도 안 빠진 앳된 얼굴 그대로 간직한 이도 있을 것이다.
나이 판별을 어렵게 만들 정도로 지나친 노안이나 동안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눈속임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10대마저 출입할 가능성이 있는 술 판매소에서 진짜 18세 이상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검사 대상의 폭을 25세까지 넓혀서 판단 착오로 인한 실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Challenge 25 제도를 알리는 포스터다.
- 어려 보인다니 좋지 않은가? 귀찮아도 신분증 검사에 협조해 달라.
- 신분증 검사를 철저히 하는 곳이니, 미성년자는 함부로 술 구매할 생각하지 마라.
등의 당부와 경고가 담겨 있다.
술뿐만 아니라 담배와 칼, 폭죽, 부탄가스 등의 유해 품목도 18세 이상만 구매할 수 있기에 Challenge 25의 적용을 받는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Fred Moon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