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고 있던 체중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숫자가 떴다.
건전지가 닳았나 싶어 새것으로 교체해 봤지만 그대로다. 거의 며칠에 한 번씩 재던 몸무게요, 몸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닌데 익숙한 내 몸무게 숫자 대신 하루아침에 괴상한 형태의 숫자가 나오다니.
혹시나 해서, 남편더러 저울에 올라서 보라고 했더니 12시 13분을 가리켰다. 내가 올라갔을 때는 9시를 갓 넘기더니, 체중계로도 시계로도 쓸모가 없군.
9시 6분이라고? 위 물체도 분명 체중계다.
고장이다 싶어, 다음 날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부탁해 체중계를 구매했던 상점에 들러보라고 했다. 교환이든 환불이든 받아야 할 테니까.
그런데, 그날 저녁 귀가한 남편은 이 '고장 난' 체중계를 그대로 들고 왔다.
직원 - 어떻게 오셨나요?
남편 - 저울에서 체중이 아닌 시간이 찍혀 나오는데요.
직원 - (직접 체중계에 올라가 보더니) 아무 문제없는데요. 이거 제 몸무게 맞거든요.
남편보다 덩치가 더 큰 직원이 체중계에 올라서자 14시 2분이 떴다고 한다.
저울이 고장이 아니라면, 시간처럼 생긴 이 숫자는 무얼까?
영국에는 미터법이 통용되긴 하지만 여전히 야드와 피트, 파운드, 스톤, 파인트 등 옛 단위가 존재한다. 시장과 마트, 술집, 골프장, 헬스장, 요리책, 도로 표지판까지 곳곳에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들도 기존의 단위에 익숙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부동산 정보란에 제곱미터 단위로 표기하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옛 평수 단위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국에서 스톤 (Stone)은 체중을 나타내는 단위로 1 스톤은 약 6.35kg이다. 미터법이 널리 활용되는 지금도 여전히 익숙한 단위이기에 체중계 눈금마저 두 가지로 표기된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한 장면이다.
체중계 바늘이 60kg을 조금 넘게 가리키는데, 이 검은 숫자 위로 10이라는 숫자가 붉고 크게 보인다.
10 스톤이 조금 안 되는 무게이다. 이처럼 아날로그 저울은 눈금이 두 종류로 표기되는 한편, 전자저울은 버튼을 눌러 단위를 변환하는 형태다.
다른 전자기기와 마찬가지로 이런 저울도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버튼이 눌러진다. 나의 경우, 스톤 버튼이 눌러진 상태에서 체중계를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측정한 숫자를 시간이라 착각하고 말이다.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될 무렵의 일이다.
당시 82.2kg이던 남편의 몸무게를 스톤 단위로 환산하면 12:13이 된다. 12시 13분이 아니라 12 스톤 13파운드.
영국인은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 1 스톤 혹은 2 스톤 감량을 목표로 삼는다. 미터법을 쓰는 한국에서 5kg 혹은 10kg 빼는 걸 목표로 삼는 것과 유사하다.
번역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단위 차이에서 오는 숫자 표현이 애매할 때가 많다. 영어 문장을 직역해 버리면 한국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단위가 나오기 마련이고, 한국인에게 익숙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어색한 숫자가 되기 때문이다.
커버 이미지: Illustration by Ogi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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