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체류를 목적으로 영국에 온 A가 한 말이다.
영국에서 정착하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하는 절차 중 특히 어렵다고 꼽는 것이 은행 관련 업무다. 계좌 개설이 까다롭고 용어나 시스템이 생소하다는 점이 특히 은행 거래를 두렵게 만드는 요소다. 영국의 금융 제도에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영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이 처한 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가깝다. 은행이 인정해 줄 신용 정보가 외국인에게는 당장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영국에도 인터넷전문은행이 생겨나면서 외국인의 계좌 계설과 카드 발급이 예전보다 훨씬 간편해졌다고 한다.
이런 신규 은행 서비스와는 무관한 시절에 영국에 왔으니 은행 개설에 부담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A의 의견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현금 인출을 할 때마다 매번 고액의 수수료를 내야 하지 않는가. 해외 카드 사용 자체가 제한될 수도 있다. 또한, 월세는 물론 인터넷 요금이나 수도/가스/전기 등의 공과금을 매달 은행에 가서 내야 한다. 지방세의 경우 무슨 이유에선지 은행도 온라인도 아닌 시청 사무소까지 매달 방문하여 현금으로 지불한다고 했다. 인구 밀도가 낮고 각종 행정, 편의 시설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전원 지역에서 차도 없이 지내던 A가 이 모든 업무를 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 글에서는, 은행 개설의 중요성이 아닌, 은행 용어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런 용어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A가 은행 개설을 꺼리지 않았나 싶어서다.
그러면, 도대체 자동이체가 영어로 뭐냐고?
미국식 용어인 automatic transfer 혹은 automatic payment 이렇게 사용해도 의미는 통할 것이다. 한편, 영국식으로는,
- Direct Debit
- Standing Order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한국어로는 '자동이체' 하나만으로 가능한데, 영국 영어로는 왜 둘이지?
그것도 전혀 다르게 생긴 단어로 말이다.
둘 다 자동이체의 의미를 품고 있고 돈을 내는 주체가 '나'라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누가 신청하느냐 또 금액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에 따라 용어가 달라진다.
카드 대금, 대출금, 공과금 등 매달 고지서가 발급되는 항목을 지불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자동이체가 Direct Debit이다.
돈은 내가 내지만, 서비스 업체, 즉 돈을 수령하는 기관이 자동이체를 신청하고 변경, 취소한다. 구독료나 난방비, 대출 이자 등의 인상으로 중간에 금액이 변경되더라도 그에 맞게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다. 물론, 지불 방법이나 금액, 이체 날짜 등에 대해 내가 요청하면 변경 가능하다.
1. 카드 대금 납부
2. 수도/가스/전기 등의 공과금 납부
3. 지방세 (council tax) 납부
4. 휴대폰/인터넷/구독 요금 지불
5. TV 시청료 납부
6. 대출금 상환
휴대폰 요금 자동이체 신청서다.
영국 생활 초창기만 해도 위와 같은 서류를 내가 직접 작성해서 업체에 전달하거나 해당 주소지로 보내야 자동이체가 성립되었지만, 지금은 온라인으로 가능하다.
Direct Debit 신청서의 주 내용은
본인 ----------(은)는
---------- 서비스에 대한 요금을
내 은행 계좌 ----------에서
----------의 업체가 매월/매주/격주 인출해 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다.
이때 내가 하는 역할은 업체의 자동이체 신청에 동의해 주는 것일 뿐, 엄밀히 따지면, 내가 아닌 업체가 자동이체를 신청하는 것이다.
이 또한 한국어로 자동이체라 번역할 수 있지만, 앞서 나온 자동이체와 차이가 있다.
적금이나 월세 등 동일한 금액을 정기적으로 다른 계좌로 이체할 때 주로 쓴다. 내 명의의 다른 통장에 혹은 가족이나 친구, 타인의 통장에 정기적으로 입금할 때도 유용하다. 내가 직접 신청하고 내용 변경이나 취소도 내가 한다.
1. 월세 지불
2. 적금 납입
3. 생활비/용돈 입금
4. 기부금 전달
5. 친구에게 빌린 돈을 매달 송금
이 모든 것을 Standing Order로 처리한다. 이 또한 이제는 간편하게 인터넷뱅킹으로 가능하지만, 예전 방식 대로라면 아래의 서류를 직접 작성해 은행에 제출해야 했다.
Standing Order 신청서의 주 내용은
본인 ----------(은)는
내 은행 계좌 ----------에서
매월/매주/격주 ----------의 금액을
----------에게 송금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다.
영국에서 열 번도 넘게 이사 다니며 수백여 건의 자동이체 신청, 변경, 해지를 해왔지만 개인적으로 위 두 가지 용어를 매번 명확히 구별하지는 않았다. 이 글을 최초로 쓸 무렵에야 두 용어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용어가 헷갈릴 때마다 이렇게 뭉뚱그려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Standing Order의 경우 자동이체 말고도 다른 뜻이 더 있다. 은행 등 금융 환경이 아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말이다.
식당 겸 술집인 펍 (Pub) 체인점의 이름이 Standing Order다.
이전에 은행이던 건물을 술집으로 개조하면서 붙인 이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전국에 있는 지점이 다 이렇게 용도 변경된 시설이다. 특히, 위 사진은 19세기에 지어져 은행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술집으로 변모하면서 당시 건축 양식과 은행 시설, 장식까지 술집 곳곳에 그대로 남겨둔 것이 인상적이다.
'자동이체' 신청서를 작성하던 장소가 이제 '서서 술을 주문'하는 장소로 변경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 형인 김정남이 암살되던 2017년 당시 외신에서 전한 기사다.
standing order
* 계속 주문
김정은이 내린 지시, 즉 '김정남 암살'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 지속되는 명령이라는 뜻이다.
커버 이미지: Illustration by VectorElements on Unsplash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