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이 되면 영국인의 옷차림에서 붉은 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거리를 오가는 행인에게도 간혹 볼 수 있지만 TV 화면 속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영국의 왕실과 뉴스 진행자, 국회의원은 물론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운동선수까지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있다. 그것도 며칠째 계속 보인다. 뭘 의미하는 걸까?
사진 왼쪽부터
1. 영국의 왕세손 내외
2. BBC 방송 진행자
3. 영국 보건부 장관과 총리
11월은 영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시기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짜로, 매년 11월 11일을 영국에서는 '전사자 추도일 (Remembrance Day)'로 기념한다. 영국의 현충일인 셈이다. 11월 11일과 가장 근접한 일요일에 전몰장병을 기리는 기념식 (Remembrance Sunday)도 열리는데, 올해는 11월 8일이다.
영국과 함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캐나다와 미국, 일부 영연방 국가도 11월 11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으며 공휴일로 지정한 곳도 있다. 미국의 '재향 군인의 날 (Veterans Day)'이 이에 해당한다.
아래의 조화가 영국인이 11월마다 가슴에 달고 다니는 꽃이다.
이 조화는, 1차 세계대전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플랑드르 들판에서 피어난 개양귀비 꽃을 상징한다. 피 흘리며 죽어간 군인을 상징이라도 하듯 들판을 붉게 물들이는 꽃이다.
플랑드르 들판은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곳에서 죽어 간 군인을 기리기 위해 매년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붉은 개양귀비가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상징하는 꽃이 된 배경에는 <플랑드르 들판에서>라는 시가 있다.
이 시를 쓴 존 맥크래는 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안타깝게도, 전쟁이 끝나는 해 전사했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동료와 그들이 쓰러진 들판에서 피어난 꽃을 보며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시가 알려진 후부터 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기리는 뜻에서 사람들이 개양귀비 조화를 달기 시작했고 추도식에도 이 시를 낭송한다.
이제, 개양귀비는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 테러에 희생된 이를 모두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 기념식이 열리는 11월 11일 하루만 꽃을 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전후의 기간까지 착용하고 다닌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붉은 꽃이 영국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희생된 장병을 추모하는 일에는 운동선수도 빠지지 않는다. 위 사진처럼 축구 선수들이 개양귀비 문양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또한, 경기에 사용된 유니폼을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군 관련 자선단체에 기증한다.
이 시기에 쇼핑센터나 학교에 가보면 현역/퇴역 군인, 사관생도, 자원봉사자가 개양귀비 조화를 판매한다. 정해진 가격은 없고 기부금 형태로 돈을 내고 가져가면 된다. 아들도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꽃을 사 왔는데, 크기가 작고 가벼워서 한 해가 지나면 잃어버리니 다음 해 또 구매하기를 반복했다.
시내 공원에서 볼 수 있는 1, 2차 세계대전 기념비에는 개양귀비 화환 (Poppy wreath)이 놓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