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출장 차 런던의 한 호텔에서 머물던 A가 한 말이다.
그가 런던을 방문한 날짜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11월 5일 전후라 추정된다. 이웃에 총기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오해하기 딱 좋은 시점이다. 설령, '영국에서 무슨 총기 사고'하며 마음은 놓더라도, 숙소가 대로에 인접하거나 방음이 잘 되지 않는 곳이라면 밤잠을 설칠 각오를 해야 한다.
영국에서 11월 5일은, '본 파이어 나이트 (Bonfire Night)' 혹은 '가이 포크스 데이 (Guy Fawkes Day)'라 부르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잉글랜드 왕인 제임스 1세가 펼치는 국교회 확립과 구교도 탄압 정책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을 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가이 포크스와 그의 일당이 신교도 국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왕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의회 개원식을 맞이하여 국왕과 상하 양 의원이 모두 국회의사당에 모이는 1605년 11월 5일을 노렸다. 이날 국회의사당 건물을 폭파시키기 위해서다. 바로, '화약 음모 사건 (Gunpowder Plot)'이다. 이들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국왕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주동자 가이 포크스와 공모자들은 사형에 처해진다.
이후 영국에서는 국왕이 무사히 살아남았음을 축하하기 위해 11월 5일을 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불꽃놀이를 벌인다. 가이 포크스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구교도들 사이에는 은밀하게 가이 포크스를 기리고 그의 실패한 거사를 아쉬워하는 날이 되기도 했다.
위 첫 번째 사진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이 등장하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이다. 두 번째 사진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가이 포크스는 죽고 그가 계획한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추구했던 저항 정신은 아직 남아 있다.
물론, 종교적 탄압과는 거리가 먼 현대의 영국에서, 이제 11월 5일을 역사나 종교, 저항의 의미로 해석하기보다는 폭죽을 터뜨리며 즐기는 날이 되었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와 모여 다양한 폭죽을 터뜨리고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이날만큼은 밤 12시까지 폭죽을 터뜨려도 되므로 누가 언제 터뜨리든 상관없다. 이 때문에 동네마다 골목마다 늦은 시간까지 폭죽 행렬이 이어진다.
총기 사고나 테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안심해도 되지만 그래도 약간의 경계는 필요하다.
미국식 풍습인 핼러윈 데이를 영국에서도 즐긴다.
핼러윈 데이 (10월 31일)와 본 파이어 나이트가 5일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중간이나 앞뒤에 끼는 주말까지 더해 일주일 이상 들뜬 분위기가 조성된다. 10월 말에 들어선다 싶으면 벌써부터 드문드문 폭죽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일부 불량 청소년의 행동이다. 불을 붙인 폭죽을 가정집 창문에 던지거나 우편함을 통해 집 내부로 집어넣는 등 범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빈집을 골라 단순히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핼러윈 데이에 대접이 부실했던 집을 찾아가 앙갚음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 시기가 되면 아이들의 장난으로 집이 파손되거나 불이 나는 등의 피해를 입는 가정이 발생한다. 이날 경찰 출동 요청이 쇄도하는 바람에 도움의 손길을 제때 구하지 못한다고 호소하는 이도 있다.
불꽃놀이 자체는 구경할 만하다. 우리 가족도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 정원이나 공터에서 작은 폭죽을 터뜨린 뒤 동네에서 늦은 시간까지 진행되는 불꽃놀이를 구경한다. 시에서 개최하는 공식 불꽃놀이 행사도 볼 만하다. 그런데, 동네에 불량 청소년이 드물다는 점이 보장되고 아들이 유아기를 벗어난 후, 이런 여유가 생겼다.
앞서 언급한 A의 경험처럼, 배경을 모른다면 성인도 견디기 힘든 소음인데 유아에게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이제 고등학생 나이가 된 아들의 젖먹이 시절, 가족 모두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간 날이다. 그날이 마침 11월 5일이었다. 집 근처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 소리가 창을 통해 끊임없이 들려오자 어린 아들이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계속 울어댔다. 나는 식사를 중단하고 아들을 안은 채 친구 집 계단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자녀가 어리다면 11월 5일의 불꽃놀이는 나중에 TV나 인터넷으로 감상하고, 당일 저녁에는 조용한 곳에 들어가 있는 것이 좋다.
영국의 11월은 비가 잦아서 주변이 늘 습하다. 이날 불꽃놀이를 하다가 화재가 나면 어쩌나 걱정하기보다는 습한 날씨에 폭죽이 불발하면 어떡하나 혹은 불꽃놀이를 위해 준비한 장작이 젖지 않을까 걱정을 더 많이 한다. 불꽃놀이가 있던 날 집 정원으로 날아들어온 폭죽 잔해를 다음 날 발견하기도 한다. 한국처럼 건조한 날씨라면 곧바로 불이 붙겠지만, 영국의 11월 잔디는 잠시만 걸어 다녀도 신발에 진흙이 묻어날 정도로 습하다.
커버 이미지: london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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