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10월, 매년 생각나는 마트 장난꾸러기들

영국에서 만난 사람

by 정숙진

"어이, 이거 받아."


남자아이가 맞은편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형제로 보이는 두 아이가 아까부터 호박 덩이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서양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핼러윈 호박이다.


십수 년 전 지금과 비슷한 10월 초순의 일이다. 핼러윈 시즌에 맞춰 선홍색 호박이 마트에 일찌감치 등장했다. 크기를 대, 중, 소로 구별해 놓았는데, 아이가 들만한 무게인 '소' 코너에 있는 호박을 한 꼬마가 던지면 다른 꼬마가 이를 받아서 '중' 코너로 넣는 식이었다.


taylor-foss-RUiqHXiwBIY-unsplash.jpg Photo by Taylor Foss on Unsplash


이들의 동작만 놓고 보면, 전날 밤이나 당일 새벽 즈음 바로 이 자리에서 직원들이 했음직한 작업과 유사했다. 중짜 호박과 소짜 호박의 자리가 뒤바뀌긴 했다만.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가 꼬마들을 발견한 나는 이들의 손발 척척 맞는 팀워크에 잠시 감탄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보호자도 안 보이고 이들의 행동을 저지할 직원도 없었다. 평소에도 한산한 편인 계절상품 코너다. 3주 이상이나 남은 핼러윈에 쓸 호박을 벌써부터 사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곧 싫증을 내고 그만두거나 부모가 와서 만류하겠지 싶어, 나는 저녁 반찬거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마트 한 바퀴를 돌고 필요한 물품을 수레에 담아서 올 때까지도 이들의 장난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가 던진 호박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거나

옆에 세워진 간이 진열대의 껌과 과자가 호박에 맞아 쓰러지거나

던져진 호박의 속도와 무게를 버티지 못해 받는 쪽 꼬마가 넘어지거나

쌓아둔 호박 피라미드가 무너져 옆에 있는 꼬마를 덮치거나


중의 한 두 가지는 반드시 발생하겠다 싶어 조마조마해졌다. 한 번 더 이들의 보호자를 찾고자 주위를 돌아봤으나 반경 10미터 내에는 생선 코너에서 칼질하는 직원만 보였다. 직접 가서 아이들을 말리고 싶건만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초딩이라도 두 명은 무섭다. 무슨 상관이냐며 내게 호박을 던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갑자기 작은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늘 술 냄새를 풍기고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아이들을 엄하게 다루는 분이라 가까이 가기 두려웠다. 명절에 만난 친척 아이들끼리 집안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며 놀고 있으면, 시끄럽다고 야단치는 작은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할아버지를 잘 아는 아이들은 하던 행동을 곧바로 멈췄다. 이런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고 떠드는 아이도 간혹 있었는데, 이런 때 할아버지의 마지막 경고가 온 집안을 울렸다.



"이 노오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할아버지의 최후통첩에도 끝까지 버티는 말썽쟁이는, 잔인하게도, 벽장에 갇히는 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호통은 너무 무서웠고 훈계 방식도 잔인했지만, 명절 준비로 바쁜 어른들의 수고도 모른 채 상차림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아이들을 저지할 필요는 있었다 싶다.


지금 이 마트 꼬마들 앞에서 그때 할아버지 흉내를 내보고 싶었다. 깊이 고민도 하지 않고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몸을 돌린 자세에서 목에 힘을 주어 최대한 굵고 길게 소리 냈다.



"이 노오옴~~~!"



환호성까지 지르며 신나게 호박을 던지던 아이들이 갑자기 움찔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누가 소리쳤는지 알 길이 없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은 죄가 있다 싶은지 제풀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근처에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아까부터 냉장 코너의 소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줌마밖에 없는데.


손에 든 소시지 포장에서 눈을 완전히 떼지 않은 채, 아이들을 슬쩍 곁눈질하던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이들이 전혀 눈치를 못 채다니. 내가 너무 심했나,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목소리 주인공을 찾아 헤매다가 저 멀리 있는 생선 코너 아저씨가 그랬나, 싶었는지 아이들은 그 방향을 주시하기도 했지만 내게는 전혀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입을 최대한 오므린 채 내뱉은 소리라, 곁에서 관찰하지 않는 한 아무도 나의 소행을 몰랐으리라. 또, 중년 남성에 가까운 목소리다. 나의 복화술과 태연함에 나도 놀랐다. 매일 저녁 아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마녀와 할아버지, 괴물, 각종 동물 소리까지 생생하게 흉내 내던 시절이다.




우연히 찾아낸 위 꼬마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만났던 아이들의 표정과 나이대까지 너무나 흡사해서다. 그 시절 꼬마들이 이미 성인이 되고도 남을 세월이 흘렀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정말, 본문 내용과 무관하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Austin Pachec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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