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를 하던 중 남편과 아들에게 넌지시 신호를 날려보았건만, 내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남자들 딴청만 부린다.
"정원에 나갈 일 있으면 바닥에 떨어진 열매 좀 주워달라고."
여름이 한창일 무렵 우리 가족은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시로 이런 자세를 취한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줍기 위해서다.
직접 키우는 나무에서 나오는 건 아니고, 담장 너머에서 자라는 개암나무 한 그루가 떨구는 열매다. 한 그루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공터에 여러 종류의 나무가 뒤엉켜 자라고 있으니 그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우린 이걸 주워다가 먹지 않고 늦가을까지 보관해 둔다.
처음에는 무슨 열매인지 몰랐다.
공터에서 빽빽하게 자라는 갖가지 나무가 계절마다 이름 모를 꽃과 열매, 씨앗을 다양하게 흩뿌리는데 이 열매도 그런 종류 중의 하나라고만 짐작했다. 내가 태어난 시골 마을에도,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던 도시에서도 이 나무와 열매를 직접 본 기억이 없기에 알지 못했다.
영국의 거리와 공원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임에도 여전히 무관심한 나는 평범한 가로수거나 태곳적부터 있던 나무겠거니 정도로만 짐작했다.
자주 들르던 청과물 상점에서 연초록의 겉잎이 달린 열매가 바구니 한가득 담겨 있는 걸 발견했다. 'Hazlenuts'라는 손글씨가 적힌 푯말도 꽂혀 있었다. 그제야 우리 집 정원 바닥을 가득 채우던 열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커피와 초콜릿에 들어가는 헤이즐넛이 바로 이거구나.
도깨비 이야기에 나오는 바로 그 개암 열매말이야.
처음에는 돈 주고 사 먹는 열매를 마당에서 공짜로 맛보는구나 싶어 신나게 주워 모았지만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맛은 그럭저럭 고소하긴 해도 내게 익숙한 맛도 아니고 무엇보다 껍질 까기가 귀찮아서다. 남편은 헤이즐넛이라는 이름의 고급스러움에 매료되어 계속 먹겠다 우격다짐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나와 아들까지 심드렁하게 반응하니 별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는 무관한 열매가 되어 땅에 내버려 두기로 했는데 어느 날부터 이걸 다시 주워 모으게 되었다.
먹지도 않을 개암을 왜 모아두냐고?
이를 말려두었다가 우리 집 터줏대감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다.
터줏대감?
이렇게 생긴 분이 하나만 있지는 않을 텐데, 매번 똑같은 생김새로 혼자만 다니시니 우리 가족은 터줏대감을 한 분이라 여기고 수 년째 모시고 있다.
열매를 올려 두는 제단도 있다.
원래는 새집이요, 새 모이와 물그릇을 올려두는 곳이지만 비둘기와 고양이들이 놀이터로 삼길래 비워두고 있었다.
이곳에다 개암을 가져다 두면 며칠 내에 터줏대감이 와서 다 먹어버리고 제단 주변은 껍질만 나뒹군다. 어떤 때는 밥그릇까지 엎어놓고 간다. 터줏대감 치고는 품위가 없다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작은 새들을 쫓아버리고 공간을 독차지하는 비둘기나 장난꾸러기 동네 고양이까지 출몰하니 누가 그릇을 엎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집 주변과 정원에 들락거리는 동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설치하는 집이 있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걸 설치하고픈 소망이 있다. 지금은 선배님들이 올리는 비디오나 감상하다가 나이가 좀 더 들면 설치해 보려고. 도대체 누가 그릇을 엎는지 그때는 알게 되겠지.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나를 경계하는 건지 다람쥐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고 나무에 달린 개암만 먹었다. 초여름부터 열리기 시작하는 열매를 나무에서 따먹다가 그것이 사라질 무렵에야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눈치를 보며 떨어진 열매를 먹었다. 그동안 정원에 쌓이는 개암의 양이 계속 늘다 보니 아무리 짐승이 먹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바닥의 열매는 인간의 발에 밟혀 일부는 부서지고, 악천후가 이어지면서 거의 다 썩어버린다.
그러니, 상태가 양호할 때 모다 두었다가 날이 추워져 동물의 먹이가 부족할 무렵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다 올려두는 편이 낫겠다 판단했다.
몇 해 전, 텃밭에서 감자를 캐다가 이상한 걸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애초에 수확을 의도하고 감자를 심은 건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삭혀 만든 퇴비를 땅에 묻었더니 그 속에서 살아남은 감자 껍질이 싹을 틔웠다. 그렇게 시작된 감자 농사치고는 풍작이다 싶을 정도로 파내는 곳마다 감자가 계속 나오길래 제법 깊숙한 곳까지 땅을 파 들어갔다.
우리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될 무렵인데, 삽질을 할 때마다 쓰레기가 종종 나오곤 하던 텃밭이다. 감자가 나오겠거니 하고 파던 자리에서 감자도 쓰레기도 아닌 작은 열매가 무더기로 나왔다. 나중에서야 개암임을 알았지만, 당시만 해도 열매의 정체를 모르던 나는 시커먼 구슬 알 같은 덩어리가 다른 작물의 생장에 방해되겠다 싶어 모두 갖다 버렸다.
그 후...
내 머릿속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왜 그 많은 열매가 땅 속에 한꺼번에 묻혀 있었을까?
감자를 다 캐내고 움푹 파인 땅을 다시 평평하게 다져놓았더니, 다음날 다람쥐 한 마리가 그 자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나의 찜찜한 추리가 시작되었다.
감자를 캐다가 내 손으로 다람쥐의 겨울 식량고를 몽땅 없애버린 건 아닐까?
확실치 않은 추리이지만 그 후로 나는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도 나 혼자만의 죄책감이다. 우리 집 남자들은, 남의 농사짓는 땅을 무단 점거했으니 오히려 다람쥐를 탓해야 한다고 나왔다. 다행히, 무슨 이유에서든 이 남자들은 매년 개암나무 밑에서 허리를 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끝